https://youtu.be/lM_nrRaPF34?si=ZnDmd281Dse-ZHAz

 


 

우리 막내 아들은 저희가 1살 조금 넘어서 한국에서 입양을 했습니다.
이 아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눈치를 봐요.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가 다리를 다쳤다는 거예요.
저희 아들이 괜찮대요? 늘 하는 대답 I'm OK.

이제 아침에 새벽 기도를 가기 위해서 제가 나왔는데 이 아들이 밤새도록 울었어요.
너무 아파서 눈이 퉁퉁 부었어요.

그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의사 선생님이 많이 아팠을 텐데

이거 어떻게 참았는지 뼈가 2개가 부러졌어요.
우리 아들이 차에 타자마자 딱 두 마디 해요.

Dad, I'm so sorry.이놈아 그럴 때는 미안하다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 때는 내가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면

마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질까 봐

그냥 그것을 참아내려고 하고 삭히려고 하고

그러면서 마음속에는 자꾸만 상처가 쌓이게 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평함은

똑같이 주어지는 것이고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을 공평함이라고 일반적으로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누구에게도 똑같이 주어질 수 없고,

누구에게도 똑같이 느낄 수 없는 거죠.
적어도 분배에 있어서는 공평하지 않습니다.

 

제가 한 번 뉴욕에 집회를 갔는데요.
설교가 끝나고 난 다음에 한 자매가 저를 찾아왔어요.
목사님 하나님은 공평하지 않아요라고 말해요.

그런데 그 자매에게 제가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네가 무엇인데 감히 논하느냐?

인간이 무엇이 간데 하나님의 공평함을 논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그 자매에게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음을 인정해야 했어요.
저에게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던 그 자매는 뇌병변을 가지고 있던 장애인이었는데,

이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이 자매가 저에게 하나님이 공평하시지 않다고 말하기 위해서

얼마나 숨을 몰아쉬면서 얼마나 힘들게 몸을 그 비틀면서 그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앞에서 제가 하나님의 공평함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많이 주셨고요.
어떤 사람에겐 적게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다섯 주셨고요.
어떤 사람에겐 둘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 주셨습니다.


제가 그 자매에게 그렇게 얘기를 했어요.

하나님은 너한테 반 달란트도 안 주신 것 같다.
그런데 하나님의 공평함이 어디에 나타나는지 아니?

 

하나님의 공평함은 하나님은 너에게 몇 개를 주셨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계시다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은 너에게 그 주신 것에 배를 남기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섯 가진 사람이 다섯 남기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시고

둘 가진 사람이 둘 남기기를 기대하신다면

이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 공평하지가 않은 거예요.
많이 가진 사람들과 적게 가진 사람들의 차이가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많이 가진 사람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시고

 

1/2 달란트나 아니면은  1/4달란트 정도 밖에 갖지 않은 그 자매에게

그 자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건

그걸 통해서 세상을 이겨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것이 다른 점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사실 그 이 굉장히 아름답고 좋은 이야기들이긴 하지만

이 인간 승리라는 말을 그렇게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 인간 승리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건 인간 승리라는 말은

마치 적게 가진 사람이 어떻게 많이 가진 사람을 이겼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장애인인데 제가 결혼을 한국에 와서 했습니다.

제 아내는 무남독녀 외동딸이었고 유학을 왔던 자매였고

세상에서 보기에는 굉장히 성공한 집안에 잘 사는 집안에 외동딸이었죠.
그런데 제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왔고 또 뭐 유명한 사람들도 많이 왔었어요.
거기에 한 분이 저를 찾아오셨어요.

그분이 찾아오셔서 너무 감격해 하시는 거예요.
이렇게 보니까 너무 좋다고 마치 제가 무슨 인간 승리라도 한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러더니 그분이 장애인 사역을 크게 하고 있는데,

우리 장애인들에게 와서 간증을 한번 해달라고 그래요.
제가 그때 좀 마음이 좀 상했죠.

지금 내가 손해 보고 결혼하고 있는데

왜 자꾸 나보고 뭐 개천에서 용난 사람처럼 이렇게 말하지?

뭐 이런 생각도 들어서 이제 좀 서운하기도 했고

그것보다 이제 사실 더 큰 문제는 제가 그래서 그분에게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혹시 이걸 성공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장애인이 이런 집안에 왼동 딸과 결혼을 했다, 이것 그러니까 너희도 할 수 있어,

그런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 우리 장애우들에게 안 돼도 괜찮으니까,

너는 그냥 있는 그대로 소중하다.
많은 걸 나누지 못해도 헬렌 켈러가 안 돼도 괜찮아.

헬렌 켈러는 어차피 한 명만 하면 되는 거고

헬렌 켈러 안 돼도 너 귀하다 라고 말해 주는 그 메시지가 사실은 그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거지.

너도 잘할 수 있어라는 말은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들고 상처받게 만드는 말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간증은 앞으로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을 때

저는 비로소 하나님의 공평함이 나타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주어진 이 환경이나 아니면 주어진 상황이 너무 달라서

이 불공평한 세상 도대체 왜 이렇게 세상은 불공평하지라는

탄식과 절망이 나올 수 있는 이 상황을

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저도 너무 답답하고 너무 화가 나기도 할 때도 있어요.

목회를 하면서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평생을 아파야 되는 거지라고 생각이 되기도 하고

특별히 이제 저는 장애인 가족들과 많이 생활을 같이 했으니까

그분들이 평생 동안 그 마음에 안고 가야 되는 그 어려운 시간들 그 아픔과 눈물들을 생각하면

이거 왜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그냥 용납하실까,

물론 이 모든 고난들이 다 죄로부터, 죄로 인하여서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
그리고 결국은 소유보다는 마음이 중요한 거니까,

마음을 잘 다스리면 상황은 어떻든 뭐 그래도 그거는 행복할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

뭐 그것도 저는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렇지만 그 부당하게 아니면 불공평하게 적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버거운 세상에서 끊임없이 비교되고 끊임없이 무시되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되는 사람들에게 이 일은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그 답이 뭐냐고 말하면?

너무 속이 탈 만큼 저에게도 그 답이 없어서

그냥 하나님이 선하시니까,

이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모든 것을 공평하게 하실 그 날이 오겠지라는

그 믿음으로 그냥 살아낼 뿐이지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이 반드시 나타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뿐이지

이 세상의 부조리한 모습들을 보면서는

어떤 희망이라든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는 가능성을 볼 만한 일들은 사실은 없습니다.


특별히 어려움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 장애인들 보면서는

저는 그런 생각들을 더 많이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아무리 애를 써도 넘어가기 어려운 그 선들,

몸부림치면서 살아가는데 결국은 그 벽에 부딪혀서

그냥 계속 좌절을 해야 되는

나면서부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세상에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는 게 중요한 문제일 것 같아요.
하나님의 공평하심은 말씀드린 것처럼 분배에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주신 사람이 있고 적게 주신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만 제가 믿는 바 하나님은 어떻게 누구에게 얼마를 주셨는가를 분명히 아실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은 그것을 아실 뿐만 아니라 저는 세상이 말하고 있는

그 기준에 의해서 한 인생의 가치를 평가해 주지 않으실 거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그럴 때 하나님의 공평하심이 거기에서 나타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은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열악한 환경에 있는 분들,

세상은 참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분들에게

제가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적게 주셨다는 사실로 인하여서 힘들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낙심하거나 포기하지는 않았으면 아 좋겠습니다.
비록 1/2 달란트 밖에 나에게 주어진 것이 없더라도

우리가 치열하게 싸워야 되는 영적인 현장에서 우리가 해야 되는 그 일들은

내가 어떻게 하면 다섯 달란트를 이길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내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또 다른 1/2 달란트를 남길 수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결국은 이 모든 것들로 인하여서 똑같이 보상하시리라

5개를 가지고 5개를 남겼던 하나를 가지고 하나를 남겼던 똑같이 보상하실 것이라는 그 믿음

거기에 공평함이 드러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조금 더 살아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고요.
그렇게 살면서 이게 워낙에 힘든 일이니까

저는 참 어렵고 힘들다는 걸 조금 이제는 좀 말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러요.

 

그러니까 하나님 왜 나한테 이렇게 하세요?
너무 힘들어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저는 말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좀 들긴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과 더 가까이 갔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너무 힘들고 버겁게 살다 보니까

꽤 많은 분들이 하나님께 대해서 굉장히 많이 섭섭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제 제 표현으로 하자면 조금 삐져 있어요.
뭐 하나님이 다 주신 거니까 괜찮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런데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하셨지라는

그 이 섭섭함, 아쉬움들이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 남아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저희는 아이가 셋이 있는데요.

이제 다 컸지만 우리 막내 아들은 저희가 1살 조금 넘어서 한국에서 입양을 했습니다.
1살 좀 넘어서 저희 집에 왔는데요. 이 아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눈치를 봐요.
저는 그래서 아 이게 1살이 넘어도 눈치를 보는구나 하는 걸 제가 좀 알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꾸 이제 눈치를 보는 편이라서 자기가 원하는 것들

또 자기가 갖고 싶은 걸 한 번도 달라고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리고 저에게 뭘 요구한 적이 없어서 그 아이의 대답은 늘 그냥 다 괜찮다예요.
억울할 텐데 그런데 다 괜찮다예요.

 

저희 큰아들이 장난이 심해서 막내 아들이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는데 뺏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그런 날은 난리가 나야 되는 거예요.

울고 불고 저를 찾아와서 아빠 형이 내 거 뺏어 갔어 저것 좀 뺏어줘 뭐 이래야 되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 막내 아들은 그냥 쳐다보고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혼자 울어요.
한 번도 저한테 형을 야단쳐 달라든지

뭐 형 것 좀 뺏어 달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별로 하는 적이 없었습니다.

 

한 8-9년 벌써 한 10년 됐는 것 같아요.

딸이 결혼식을 동부에서 했어요.
미국 동부에서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제 아내는 먼저 동부로 갔고

저는 제 아들을 데리고 결혼식 이틀 전에 가기로 그렇게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떠나기 이틀 전인데 저희 아들이 전화가 왔어요.
학교에서 운동을 하다가 다리를 다쳤다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제가 짜증이 나더라고요.

이제 비행기도 타야 되고 큰 일이 남았는데 다리 지금 다치면 어떡해

그래서 어 많이 다쳤어? 이제 그랬더니, 운동을 하다가 다쳤는데 좀 아프대요.
그래서 집에 일찍 왔다고 그래요.

제가 이제 교회 일이 바쁘니까 그러면 나는 못 가고

내가 우리 교회 집사님께 부탁을 드릴 테니까 한의원 하시는 집사님이 침을 좀 놔주시면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침 맞고 그리고 괜찮아지면 다음 날 비행기 타자. 그랬어요.
제 아들이 그러겠다 그래요.

제가 집사님께 부탁을 드리고 저녁에 들어가서 봤더니

집사님 말씀이 다리가 좀 부었는데 침을 하루 더 맞아봐야 될 것 같다 그래요.
저 애들에게 물었습니다.

내일 하루만 더 침 맞고 가면 되겠지? 괜찮지? 저 애들이 괜찮대요.
늘 하는 대답 I'm OK. 난 괜찮으니까 괜찮다 그래요.

 

그러니까 저는 그냥 그렇게 하고 들어갔다가

이제 아침에 새벽 기도를 가기 위해서 제가 나왔는데 저희 아들 방에 불이 켜져 있는 거예요.
제가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이 아들이 밤새도록 울었어요.
너무 아파서 눈이 퉁퉁 부었어요.

제가 많이 아프냐? 그랬더니 조금 아프대요.

그날이 수요일이었는데 난 교회 일이 바쁘니까. 집사님이 와서 침 한 번 더 놓으실 거야.
그러면 괜찮아지겠지? 어. 그러면 우리 비행기 타면 된다 그랬더니, 그러겠다 그래요.
그리고 제가 교회로 나왔는데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어요.
그래서 그날 낮에 그냥 이야기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로 갔습니다.

응급실에 가서 그 엑스레이를 찍어보더니,

의사 선생님이 많이 아팠을 텐데 이거 어떻게 참았는지 대단하다 그래요.
그 뼈가 2개가 부러졌어요. 그래서 겹질려 있더라고요.
아, 그런데 너무 마음이 좀 안 됐잖아요.

그래서 그 이제 수술을 받고 그다음에 이제 다 깁스를 하고 나오면서

우리 아들이 차에 타자마자 뒷자리에 앉더니 딱 두 마디 해요.

 

Daddy I'm so sorry. and thank you.

아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근데 그 말을 듣는데 그냥 제가 속에 뭐가 이렇게 확 올라오는 것처럼 화가 치미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제 아들한테 소리를 질렀어요.
"이놈아, 그럴 때는 미안하다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 때는 그럴 때는 잘못했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고맙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럴 땐 화를 내는 거야. 아빠 들었지? 아빠는 목회가 더 중요해? 내가 더 중요해?

아빠는 내가 지금 다리가 지금 부러졌다는데. 그런데 아빠가 관심이 있어?

어떻게 나보고 그냥 참으라고 그럴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해야 되는 거야.
고맙다가 뭐야! 그리고 미안하다는 말이 무슨 말이야?


그때 문득 저에게 들었던 생각은 뭐냐 하면

이 아들이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나?

그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마음이 좀 아팠어요.

아직도 나를 아버지라고 생각하지 않나?

왜 나한테 투정을 못 부리지? 왜 나한테 화를 못 내지?

그 생각이 좀 들더라고요. 


세상은 참 불공평합니다.

그리고 그 불공평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많이 아파요.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리고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도 내가 힘들어서 힘들다고 말하면 믿음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거나

내가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면 마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여겨질까 봐,

그냥 그것을 참아내려고 하고 삭히려고 하고 그래서 그것을 견뎌보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 모습들이

우리가 어떨 때 볼 때는 그러면서 마음속에는 자꾸만 상처가 쌓이게 되는 것 같아요.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제가 만일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제 아들의 그 경우를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오히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좀 알아야 될 것 같아요.
화도 좀 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거죠.

그러면서 우리를 만지시고 우리와 그럼에도 동행하시고

기어코 우리를 공평하게 다루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경험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이 부당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믿음으로 살자고 말하면

그 말의 의미는 그냥 다 닫아버리고 살자는 말인 것처럼

아예 나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나의 부족함에 대해서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같기는 해요.

 

저는 그래서 낙망하지 않고 우리가 좀 살아내줬으면 좋겠는데,

그러기 위해서 제가 좀 아주 간곡하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나님 앞에 아뢰세요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하나님께 좀 따지세요라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셨는지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 힘들게 하셨느냐고

그렇게 구하는 중에 저는 혹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게 더 낫겠다.

 

전 제 아들이 저에게 그냥 아빠가 왜 도대체 나한테 이러는 거야?
라고 말하고 아빠 나 사랑하기나 해 라고 그렇게 물어주어서

제가 오히려 그 아이들에게 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그런데 내가 너를 정말로 사랑하고 내가 정말로 너와 함께 할 거고

그리고 내가 정말로 너를 버리지 않을 거고

어떤 경우에도 너는 세상에 어떤 것보다 나에게 소중한 아들이야 라는

이 말을 해줄 수 있는 기회를 좀 주었더라면 하는 그러한 마음도 저에게는 있는 것처럼

우리는 왜 세상이 이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오히려

하나님 너무 힘들어서 힘들다고 말하고 너무 아파서 아프다고 말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그 만지심과 위로하심을 그 추구하고 있는 그 모습이 중요할 것 같아요.

다윗이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도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이렇게 낙심하며 낙망하는고라는 그 기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한데

그런데 내 영혼은 왜 자꾸만 이렇게 낙심하는가라고 그렇게 절망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자기의 어려움과 아픔을 토로한 다음에 그다음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는 경험하는데

우리는 너무 응답을 미리 경험하려고 하거나 말하려고 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는 세상이 공평하냐고 말하면 아 저는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공평하지 않은 세상을 우리가 어떻게 하면 공평하게 만들 수 있을까 최선을 다해야 되겠죠.
그런데 인간의 죄에 욕심에서부터 비롯된 세상은 그렇게 공평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런 세상에서 적게 주어진 사람들에게 제가 부탁하고 싶다면

그래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살아내는데 이게 힘든 일이니까

하나님 앞에 더 매달리고 더 하나님과 가까이하시고

또 더 하나님을 붙드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래도 좀 더 많이 주셨다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그분들에게 좀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것은

그 많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그냥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그냥 누리려고 하기보다

조금 더 베푸는 삶을 살았으면 어떨까,

뭐 재물뿐만 아니라 조금 더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공평함이 여러분들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 속에서 경험될 수 있도록

그러한 사명을 가지고 살아내 주셨으면 좋겠다 하는 그러한 마음도 있습니다.
많이 있기 때문에 어 무시하거나 힘들게 하는 일들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게 되는 그 아픔들은

주어진 현실의 부족함 그것들이 가져다주는 불편함 그것 사실은 굉장히 커요.
크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견딜 만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더 견디기 힘들어질 때는 뭐냐 하면 바로 그 부족함으로 인하여서 비교될 때입니다.
그리고 그 부족함 때문에 무시를 당한다고 생각할 때인 것 같아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이 사는 데 굉장히 불편하기는 하더라도

그래도 뭐 불편한 대로 그냥 또 살자면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부족함과 연약함이

누군가에 의해서 무시를 당하거나 짓밟히는 어떤 그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이 견딜 수가 없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정말로 조심해야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누르거나 무시하는 일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하나님의 공평함이 그들의 삶 속에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경험될 수 있도록 살아주셨으면 고맙겠다는 생각입니다.

 


- 하나님께 드리는 솔직한 고백 어떻게 하시나요?


 

저는 오히려 반대였던 것 같아요.

는 솔직히 나갈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장남 신드롬 때문에 그랬는지

제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강해 보이고 싶어서 그랬던 건지 잘 못 했었어요.
그런데 요즘에 해요.

그리고 요즘에 제가 굉장히 많은 자유를 더 경험하게 되는 것 같아요.


하나님께 내 아픔을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

내가 난 이거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게

꼭 무례함을 의미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인데

힘드니까, 그냥 하나님 너무 힘들어서 이거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하게 해주세요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왜냐하면 제가 원하는 건 뭐 욥도 그랬지만 제가 원하는 건 답이 아니에요.
제가 원하는 건 답이 아니라 임재예요. 동행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왜라고 물을 때

그 왜라는 질문에 담겨 있는 건

그러니까 논리적 답을 달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때도 거기 계신 거죠 그걸 묻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 혼자 아니죠 지금 그걸 묻고 싶어서 왜예요라고 묻고 있는 거니까

제가 그런 도대체 왜 나만 이래야 되는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 말 속에는 하나님이 그래서 내가 그래도 너 안 버려라든지, 내가 끝까지 함께한다 말씀하시고

그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경험되면 그러면 오히려

안 한다고 했다가 기도 끝날 때쯤이면 아이 갈게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계속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찾으니까.

그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고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할 때 아 꼭 이제 그렇게 말하죠.
그 대신에 뭐 이제 내가 이거 하면

하나님 붙들어 주셔야 됩니다라든지

꼭 이거 잘 하게 해 주셔야 됩니다라든지

뭐 그런 결국은 그게 하나님과 교제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제가 생각하는 자유는 제가 저의 약함을 이제는 인정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거

그게 자유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전에는 교인들 앞에서 제가 뭐 신앙적으로도 그렇고

내가 넘어진다. 내가 흔들린다. 뭐 나는 나는 정말 하나님이 섭섭합니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컸었어요.
그런데 이게 내 어떤 의지나 아니면 나의 이 어떤 믿음의 성숙함이 아니라

바로 그 복음의 은혜 때문이라는 거를 알고 나니까.

제 경우는 저의 약함을 인정하는 게 훨씬 쉬워졌고

약함을 인정하는 게 쉬워지고 나서

 

약함을 인정하니까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https://youtube.com/shorts/nxkQBPzLOeY?si=oi1H4GspHrU2vM9E

 

주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현실적으로 가능합니까?

우리가 살면서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먹을 것 입을 것을 가지고 염려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걸까요?

 

아니, 그 반대로 염려를 하지 않고 사는 삶이

혹은 태만하거나 아니면 무책임한 삶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저는 우선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가를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방식이

그렇게 그냥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염려하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러한 인생관을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셨다고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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