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cLdiJJtq97U

 

 

 

 

[설교타이핑]출애굽기 3장11-14절|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김완규 담임목사님(세종한빛교회)| 주일예배| [25.01.126]

 

 

[3:11-14]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우리 옆에 분들과 같이 한번 인사하죠. 팔복 많이 누리세요. 이렇게 세 분씩 좀 한번 인사해 보실까요? 팔복 많이 누리세요. 명절 동안 하나님의 또 귀한 복들, 팔복의 은혜 많이 누리시길 바랍니다.

 

뜬금없는 질문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경비 아저씨 이름 아세요? 너무 뜬금없죠? 그렇죠? 그분은 알기는 아는데, 그렇죠. 알기는 아는데 이름까지 알 수는 없죠. 알고 알려고 하지 않겠죠? 저희가 그렇습니다. 저희가 이름을 안다는 건 이렇게 그 사람과 교제를 하겠다라고 하는 의미가 들어 있거든요. 내가 그분의 이름을 알겠다. 또 그분과 뭔가 앞으로 이렇게 계속해서 나눔을 갖겠다. 아이가 뱃속에서 이렇게 생겨나는 순간 태명을 짓죠. 그 이름으로 이 아이를 명하죠. 부르고 교제합니다. 이름은 그런 힘이 있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그와 이제 연결고리가 돼서 서로의 나눔을 갖게 되는 거죠. 관계의 시작이 이름을 아는 것부터 시작이 되는 거죠.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는데 모세가 오늘 뭐라고 얘기하냐면 이름이 뭐예요?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그럼 그전에는 몰랐나? 하나님을 몰랐을까요? 아니, 하나님 위해서 40세 때 왕자의 직도 내려놨잖아요. 근데 80세 때 뜬금없이 이름 뭐냐고 물어보시면 어떡해요 그러면 이름 모르고 불렀나요? 그런 거죠. 굳이 그분과 이름을 부를 필요가 없는 거죠. 어제 큐티 본문에서 예수님의 권세에 대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시는 말씀이 있었어요. 같이 읽어보죠.

 

[4:33-34]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이 예수님을 향해 하나님 거룩한 자라고 얘기했고, 그런데 귀신의 특징입니다. 굉장히 정확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예수님과의 상관, 예수님과의 관계를 갖고 싶지 않아요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또 동일한 밑에 나오는 또 귀신을 쫓는 장면입니다. 같이 읽죠.


[4:41]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알더라 그랬어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메시아 너무 정확히 잘 알고 있지만 귀신은 그 예수님과 관계를 맺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의 용서, 예수님의 긍휼, 예수님의 새롭게 하심 예수님의 부활을 나의 것으로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교회 학교에서 아니면 성경 공부 때도 혹시라도 말할 수 있을 정도까지 돼도 그 부활을 그 용서를 그 은혜를 내 걸로 가져오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그건 귀신의 믿음입니다. 내가 예수를 안다고 얘기하지만 누리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울리지 않는 상태라면 그래서 우리가 이런 믿음을 무슨 믿음이라고 한다고요? 귀신 같은 믿음이라고 하는 거죠. 성경에서 안다라고 하는 단어들이 등장을 해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영어의 no라는 단어가 안다라고 하는 단어로 쓰이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라는 건 no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이 한번 읽어보죠.

 

[6:6]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아는 건데 아는 거잖아요. 근데 이 안다라고 하는 단어가 어떻게 쓰이냐면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셋째를 낳았다. 셋을 낳았다 할 때도 이야 이 야다라고 하는 단어를 씁니다. 안다라는 단어가 경험하다라고 하는 단어와 동일해져 있는 거예요. 그냥 아는 게 아니고 내가 그냥 살과 살을 부대끼고 내 몸과 그의 몸이 하나가 되고 그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물론 히브리어에는 “다바크”라고 하는 연합하다라고 하는 단어도 있지만 “야다” 알다 내가 그를 경험했다라고 하는 단어를 쓸 때도 즉 지식의 앎이 아닌 경험의 암, 그리고 삶 속에 들어온 앎을 얘기할 때 안다라고 얘기를 한단 말이에요. 신약 성경도 “기노스코”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을 해요. 같이 한번 읽어보죠.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뭐 한다? 아는 것 이니다. 그랬어요. 안다 여기도 안다라고 돼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안다라고 하는 이 기노스커라는 단어가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할 때 같이 읽죠.

[1:34]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여기서의 알다와 동일한 단어예요. 그러니까 머리로 아는 거 아니에요? 경험하는 거예요. 예수 아냐고 예수 알죠? 근데 그 예수가 나를 용서한 걸 믿어요? 그 예수가 나를 데리러 오실 걸 믿으세요? 그 예수가 나를 죽음에서 건지실 걸 믿으세요? 그 예수가 임마누엘로 지금 내 안에 계신 걸 믿으세요? 내가 수술실에 들어가도, 내가 법정에 가도, 내가 업무를 볼 때 막혀도, 내가 대출이 막혔다고 은행에서 고개를 설레설레 젖는 순간에도, 그 예수가 나와 함께 영원히 계신 걸 믿으세요? 내가 그 예수를 경험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을 삶의 구석구석에서 누리는 거예요. 그게 예수 안다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귀신은 안다고 얘기했어요. 그러나 예수님과 상관하기를 원치 않아요. 우리의 앎이 하나님의 이름을 알아가는 이 앎이 우리에게 더 넓어지고 더 깊어지고 확장되는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장례를 치르기 참 힘든 가정이 저희 교인는 아닌데 계셔서 부탁을 하셔서 갔다 온 적이 있어요. 그 두 분만 신앙생활을 하는데 모든 가족들이 다 믿지 않아요. 그런데 돌아가신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영접 기도를 하셨어요. 어느 정도로 영접 기도를 하셨냐면 계속 이제 이제 투병을 하시면서 마지막에 예수님 전하니까 아멘을 간신히 하셨어요. 아멘 하고 간신히 하시고 그다음부터 말을 못하게 되셨어요. 정말 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분의 영혼을 이렇게 받아주셨어요. 예배는 예배로 교회장으로 진행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으시니까 도움을 좀 구하셔서 어쩔 수 없이 저도 참석하면서 예배를 진행했어요. 분위기는 되게 좋았어요. 왜냐하면 마음들이 따뜻한 분들이시더라고요. 그래서 미안해 고마웠어. 감사했어. 이런 마음들을 사진을 보면서 막 나누시더라고요. 마지막에 하관을 하면서 취토할 때도 고맙다고 정말 감사했다고 이러면서 따뜻한 마음들이 진행이 됐어요. 좋았어요.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어요. 한 줌의 재가 됐어요. 정말 한 줌의 재가 돼서 하얀 종이에 그 재를 이렇게 들고 몇 센치 되지도 않는 그 작은 사각형 구멍에 그 재를 봉지를 넣고 흙을 덮는데 그게 정말 그게 이 세상의 끝이라고 여기는 그분들 앞에서 저는 그 죄가 다시 살아서 부활해서 하나님의 영광 속에 들어간다는 설교를 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정말 예수를 안다는 게 뭘까? 이 재를 이기고 이 재가 영원한 부활의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영원토록 하나님과 왕 노릇하는 그 영광을 믿는 게 예수 믿는 거라면, 내가 죽음 앞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건 죽음 앞에서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정말 예수를 신앙생활을 몇십 년을 했지만 정말 재가 되는 그 문제 앞에 아니 이게 살아 이게 영원히 살아 영원히 살아서 하나님과 영원히 그 영광을 누려라고 하는 것이 머리가의 지식이 아니라 내 영혼의 생명이고 내 가치관이고 내가 갈 길이고 그것 때문에 무엇과도 이 믿음을 버릴 수 없고 이 길을 가겠다라고 나와 상관 있는 예수로 받아들이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바라는 거야. 어느 누구도 부활을 인정치 않고 그 자리에 모인 모든 분들이 그 거룩함의 영광, 죽음 이후의 영광, 영원한 생명을 이렇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 분위기들, 그러니까 감사도 소망도 영광도 감격도 없는, 그저 위로와 격려와 쓸쓸함, 그것이 다인 그 분위기, 그래서 정말 계속해서 복음 제시를 할 수밖에 없는 시간들이 저에게 왔었어요. 또 참 귀한 시간들이었어요.

 

김양재 목사님이 나이 서른이 돼서 두 아이를 남겨놓고 남편을 먼저 보냅니다. 40년 전에 두 아이를 놓고 과부가 됐다라는 게 어떤 의미일까요? 여러분 전 그때는 장례식장이 없었어요. 집에서 다 했어요. 안방에서 누워 있던 그 안방에 관을 갖다 놓고 거기서 예배드리면서 장례를 치르는 거 아니겠어요? 그 시체가 있던 그 관을 낳았던 그 방에서 다시 차야 돼요. 그리고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까요? 홀로 됐다라고 하는 막막함, 시체가 있던 그곳에 누워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그 두려움, 그리고 죽음에 대한 그 삶에 대한 염려들이 오지 않을까요? 근데 버젓이 거기서 잠을 자고 바로 그 집에서 큐티 모임을 하고 그렇게 삶을 살아갔어요. 그러다가 우리들 교회가 된 거죠. 여러분 왜 그렇게 무섭고 힘들지 않았겠어요? 그러나 남편의 죽음을, 남편이 예수님을 정확하게 영접했고 그의 죽음을 에스겔서 큐티 말씀으로 정확하게 해석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죽음이 남았고 좌절이 남고 절망이 남은 게 아니라, 말씀이 남고 해석이 남고 성령의 인도가 남아버렸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상관하면서, 그 예수님과 경험하면서, 그 죽음 가운데 부활을 보면서, 또 그 자리에서 생명의 역사를 써내는 거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삶 속에 그냥 지식과 관념이 아니라 생명이 되고 능력이 돼서 상관이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는 거예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아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면서 침묵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를 살리기 원하시는 그 사랑, 목숨 걸고 아들을 내놓고 나를 건져내시는 그 아버지의 열심, 그리고 나를 그렇게 존귀한 자라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 이걸 아는 순간 나에게 그런 나를 그렇게 여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으니, 내가 그 예수를 어떻게 내가 거부할 수 있겠으며, 내가 그 예수를 어떻게 내가 저울질할 수 있겠으며, 내가 그 예수 앞에 내 인생을 다 걸어도 내 인생은 주님 거라고 얘기하지 않을 수 있겠냔 말이에요. 여러분 예수 알지만 우리가 예수님과 상관하기를 원하고, 예수님이 내 삶 속에 파고 들어오시기를 원하는 거고, 죽음의 문제, 물질의 문제, 자녀의 모든 부분에 그분의 간섭이 임하시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 안에, 모세 안에, 추상적으로 알던 하나님 이름도 몰랐던 그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면서 내가 너와 이제 본격적으로 상관하고 간섭하겠다라고 다가와 주시는 본문이 오늘 본문이죠. 1번 같이 봤죠.

 

1. 나보다, 세상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우리 9절로 11절 같이 받겠습니다.

 

[출3:9-11]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내가 누구이기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40년 전에는 이 질문 안 했어요. 저 같은 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어요. 나 같은 사람이 하지 이번에는 왜 이 질문을 할까요? 답은 한 가지예요. 할 수 없다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좌절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래요 어떤 생각 속에서 40년 전에 움직였다고 그랬어요. 같이 읽죠.

 

[행7:25]

25 그는 그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통하여 구원해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 내 힘으로 안 되는 거구나. 이게 내 능력, 내가 갖고 있는 지혜, 열정 갖고 되는 게 아니구나. 그래서 똑똑하고 야무진 엄마 아빠들이 대학도 잘 나왔지 직장도 괜찮은데 애들이 이상한 거예요. 내가 그렇게 열심히 학창시절 보냈고, 나는 주님 위해 헌신하고 있고, 내가 그렇게 멋진 삶을 살겠다고 얘기하는데 애들을 마음대로 못하는 거예요. 여러분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 겸손해질 수 있어요.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삶을 경험할 때 이제부터 상대방의 연약함을 들을 수가 있어요.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걸 경험할 때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섬길 수 있고 섬김을 받을 수 있고 손을 내밀 수 있는 자리로 갈 수가 있어요. 이게 하나님의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르겠어요. 내가 내 마음대로 잘 살았지 투자도 잘 됐지 애들도 잘 됐지 아파트도 올랐지 갈수록 나는 멋져지지. 글쎄요. 여러분 내 힘으로 안 되는구나. 나에게 이런 절망이 있구나. 바닥을 치는구나. 내가 할 줄 알고 뭔가를 했는데 여기까지밖에 안 되는구나. 여러분 이 시간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주고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을 바라봐 줄 수 있는 시간이 열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때 하나님께 엎드릴 수 있는 거예요. 우리가 언제 엎드릴 수 있겠어요? 뭐가 아쉬워서 엎드리겠어요?

 

[질문]

- 나는 하나님 알고 있어요? 아니면 그 하나님을 삶 속으로 경험하고 계세요?
내 신앙 연수만 혹시 자랑하고 있지는 않나요?

그거 말고 내가 정말 하나님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싶습니다. 이 간절함과 목마름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방금 읽었던 부분을 다른 버전으로 한번 읽어볼 텐데 같이 읽죠.

 

[3:11-13쉬운말]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었다.

저 같은 것이 어찌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
12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다. 너는 내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어라.

그 뒤 너희는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주님의 응답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바로 모세가 두 가지의 지금 질문을 하죠. 내가 누구길래 이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응답은 한 가지입니다. 내가 너랑 함께하겠다. 나 없이 갔지, 나와 교제 없이 갔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이거 하면 좋겠다라는 뜨거운 열정 갖고 달렸지 이제 내가 누군지 너에게 알려주고 나랑 같이 가자 이렇게 얘기해 주시는 거죠. 모세가 또 하나를 물어보죠. 당신은 누굽니까? 그러니까 두 가지 질문을 하는 거예요. 도대체 내가 누굽니까? 당신은 누굽니까? 오늘 두 가지에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거죠. 여러분 내가 주의 사역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우리의 기준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내가 할 수 있다, 없다가 아니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 내 삶의 기준이 됐으면 좋겠어요. 찬양할 때 내가 주의 임재가 안 느껴지면 하나님 제 찬양이 맞습니까? 기도할 때 내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 느껴지지 않으면 설교를 하는데 내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면 우리 고민해 봐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우리가 연수를 자랑할 수 없어요.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지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의미가 뭘까요? 잘은 모르겠어요. 한번 여러분 스스로 한번 답해보세요. 하나님이 함께한다는 게 뭘까요? 먼저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내가 누가 의식이 될까요? 누가 의식이 돼요? 하나님 의식이 돼요. 아멘. 여러분 야동 보실 때 누가 함께 하시는 거예요? 옆에 분한테 지긋하게 말씀하세요. 주께서 함께 하셔 이렇게 시작 아멘 아멘 의식이 돼야죠. 내가 막 화가 확 올라올 때 내 이 분노가 올라올 때 누가 의식이 돼야 돼요. 하나님의 의식이 돼야죠. 지적을 하지 말고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그 말을 할 때 내 속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 주님 그 감정을 누구도 그대로 받고 계신다. 주님이 그대로 받고 계신 거 아니에요? 주님 의식이 돼요. 여러분 주님이 계시면 나에게 말씀하실까요? 말씀하시죠. 들리세요? 말씀이 들리세요? 말씀이 머리로 와요. 가슴으로 와요. 말씀이 들려서 내가 막 그 말씀 따라가고 싶어요. 아니면 훅 읽고 끝나버려요. 여러분 정말 주님이 계시면 말씀하실 거 아니에요. 그러면 그분과 말씀을 나눠야 될 거 아니에요? 그분의 말 한마디에 그분의 단어 하나가 내 영혼을 녹여야 되는 거잖아요. 그 말씀 때문에 내가 죽었다 살아났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었는데 이 생명이 들렸는데 어떻게 내가 반응하지 않을 수 있어요.

 

여러분 내가 주님과 함께하고 계시면 사람을 만날 때 어쩔 땐 그럴 때가 있잖아요. 빨리 이 사람 처리하고 싶다. 왜 다음 거 해야 되니까 여러분 그때 하나님이 이 사람을 세우신 하나님의 뒤에 서 계신 하나님이 보이기를 축복해요. 그러면 내가 내 말이 아니고 이분을 만나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가 뭔지 고민해야 되는 거잖아요. 처리가 아니고 이분을 내 앞에 두신 하나님 앞에 물어야 되는 거잖아요. 이분을 이 사건을 이 상황을 허락하신 주님께 내가 여쭤야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야 되는 거잖아요. 물론 다 들리진 않아요. 안 들리면 안 들리는 대로 가야죠. 안 들리면 안 들리는 대로 “글쎄요”라고 얘기해야죠. 잘 모르겠다고 얘기해야죠. 저 같은 사람은 굉장히 또 아는 체 할 거 아니겠어요 영감 있는 목사처럼 보이려고 그때 저는 얘기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아는 상식으로는요. 제가 아는 말씀의 기준으로는 이런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집사님 한번 생각해 보시죠. 여러분 주님과 함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분이 의식되기를 바랍니다. 잠이 안 오세요. 뒤척이세요. 며칠째 불면증으로 힘드세요. 그러면 잠 못 자고 있는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이 계실 거 아니에요 그럼 왜 나는 잠이 안 오는지 모르겠다고 화를 내기 전에 하나님 왜 저는 잠이 안 올까요? 왜 이렇게 힘들까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뭘 하기를 원하시는가요? 물어봐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주께서 여러분에게 대답을 하지 않으시면 거의 상식선에서는 레위기를 읽으시면 5분에서 7분 사이에 주무실 수 있는 저만 그렇습니다.


명절날 참 만나기 쉽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겠죠. 그냥 어쩔 수 없이 만나는 그 자리에 가겠죠. 애들은 또 거기 가야 돼 이 소리를 하면서 어서 타라고 이러고 이제 애들을 막 어떻게 던져놓고 또 가셔야겠죠.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를 바라는 거예요. 제가 여기서 어떻게 할까요? 제가 이분들과 어떻게 만날까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했으면 가기는 싫어하고 만나긴 만나야겠고, 내 마음도 그런 이 모든 상황을 주님이 아신다면, 주님 제가 뭘 하기를 원하시냐고 물어야 될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지혜와 영감을 받으셔야 되지 않겠어요. 내가 너랑 함께할게. 이제 나 없이 갔지. 니 열정으로 갔지, 니 계획대로 갔지 걱정하지 마. 내가 너랑 함께할 거니까. 여러분 주님과 같이 가십시오. 차가 서면 서는 대로 막히면 막히는 대로 뚫리면 뚫리는 대로 주님과 교제하며 가십시오. 그 시간들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복된 시간인지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복하는 것. 두 번째 같이 읽죠.

 

 

2. 스스로 계시는 주님이 이끌어 가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13절입니다.

 

[3:13]

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럼 지금까지 정말 이름을 몰랐냐고 묻고 싶은 거예요. 정말 그런데 백성들은 분명히 이렇게 물을 겁니다. 이집트에 많은 신들이 있거든요. 여러분 10가지 재앙에 나왔던 모든 것들이 다 신입니다. 개구리가 신이었냐고요? 헥트라고 하는 신입니다. 다산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우리도 개구리도 다 섬기잖아요. 거북이, 거북이도 아니다. 두꺼비 두꺼비 섬깁니다. 우리도 섬깁니다. 태양신 라를 섬깁니다. 오시리스, 이시스를 섬깁니다. 애굽에 있는 많은 신들을 섬깁니다. 애굽에 나왔던 모든 10가지의 재앙이 전부 다 신들입니다. 그 신들 그들 중에 하나가 널 날 보냈냐? 누구 신이냐? 묻고 있는 거겠죠. 백성들은 그러나 모세가 그걸 몰라서 지금 묻냔 말이에요. 참 궁금해지더라고요. 당신의 이름은 뭡니까? 한번 알고 여호와라고 알려주든지, 근데 아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셨어요? 모세는요. 이제부터 하나님을 진짜 알고 시작하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볼 때는 자기가 시작하는 거 말고 나를 보내신 분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한 다음 가고 싶은 것 같아. 여러분 우리 안에 내 마음대로 내 열정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으로 한번 투자하고 해봤다가 바닥을 쳐본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쫄딱 바닥까지 쳐보신 분들은 그다음 일할 때 굉장히 조심하며 근신하며 기도해 보려고 하고 하나님께 물어보려고 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보려고 몸부림 쳐보시더라고요. 모세는 한 번 40년간을 지금 바닥을 쳤어요. 이제 내 모든 시작, 내 모든 말, 내 모든 움직임이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기를 하나님에게서부터 시작되기를 소원하는 거예요. 사단이 보내서 말을 시켰으면 사단이 원하는 말을 할 것이오. 하나님이 보내서 말을 하게 시켰으면 내 입에서 하나님의 말이 나올 거 아니겠어요?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만나는지 보시면 될 거 아니겠어요? 내 동기가 뭔지를, 나를 보내시는 분 정확히 알려주시고, 내가 그 하나님에게서부터 내 말과 행동과 시간이 삶이 시작되기를 원하오니, 나에게 당신이 누구인지 좀 가르쳐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말할 때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 왔는지를 말할 수 있도록 나에게 가르쳐 달라고, 여러분 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질문]
- 나의 말과 행동의 근거는 어디 있을까요? 하나님의 부르심일까요? 내 영광과 자랑일까요?

왜 그 말하세요? 왜 그런 눈빛 주세요. 왜 그 물건 사세요? 왜 그거 쳐다보고 계세요? 그 동기가 뭔지 이제 말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하나님의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이 이렇게 답해 주시죠. 같이 한번 읽습니다.

 

[3:14]

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름을 물었어요.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요리 잘하는 자예요 이름이 뭐냐고요? 운동 잘하는 자예요 아니 이름이 뭐냐고요? 이름이 나 스스로 존재하는 자야. 이름이 뭐냐니깐요. 여러분 왜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시죠? 여러분 하나님은요. 하나님의 이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시려고 물어본다면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은요.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줘 버리세요. 여호와 이래,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치누케누, 여호와 삼마, 여호와 라파, 그냥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 그대로 자신의 이름을 공개해 버리세요. 그 일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같이 등장해 버리세요. 나는 치료하는 자야, 나는 목자야, 나는 너희들을 여기 함께하는 그러한 신이야.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자신의 행위와 동일하게 말씀해 버리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이름이 곧 하나님의 행위가 되기 시작하는 거죠. 하나님 당신 누구세요? 나 스스로 있는 자야, 누구도 시작하지 않았어 내가 시작됐어요. 여러분 영어 성경에 나는 나야 뭐 이렇게 표현이 돼 있어요 I am who I am이에요. 나는 나야. 누가 이렇게 질문해서 답변을 나는 나라고 답변을 들으면 여러분 어떠시겠어요? 나는 나야 이러면 아픈가? I will be who I will be. 내가 되고자 하는 대로 되어지는 나야. 들어도 들어도 모르겠어요. 재밌는 건 m이라고 비동사의 m이 어떻게 쓰여지는지 나는 존재해. 나는 그 존재 그 자체야. 영어도 비동사가 있지만 히브리어도 비동사가 있어요. 하야 동사라고 이 하야 동사의 의미 여러분 하야 동사가 어떻게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 있죠? 창세기에서 보면 하나님 뭐라고 하세요? 빛이 있으라 그랬어요.

 

[1:3]

3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 / There was light.

 

그럼 어떻게 돼요? 빛이 생기는 거죠? 비동사로 집어넣으면 렛 데어 라이 빛이 있으라 그랬어요. There was light. 생겨버렸어요. 존재해버렸어요. 것처럼 이걸 하야 동사로 바꾸면 그래요. Let there hayah Light / There hayah light. 빛이 존재해 버리는 거예요. 없는데 빛이 없다가 산과들이 없다가 우주가 없다가 존재해요. 생성되어 유지되어 작용돼서 계속 가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에요. 없는데 있으라. 하심에 그대로 되니라. 우리 같이 한번 선포해 보죠. 있으라 하심에, 그대로 되니라. 이게 하나님 말씀의 특징이에요. 하나님께서 복을 명해버리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 세상에서 이런 표현을 써요. “박복하다”라고 “박하다”고 복이 없다고 그런 자에게 주께서 내가 네게 복을 명한다고 선포해 버리시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복도 없고, 남편 복도 없고, 자식 복도 없고, 재물 운도 없다고 얘기하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해버리면 어떤 일이 생기냐 그 말이에요. 내가 너에게 복이 없는 그 속에서 복이 존재하고 유지되고 강화되고 계속 진행될 수 있도록 내가 이끌어버리겠다. 나는 스스로 그것을 없는 데서 이끌어내서 되게끔 유지해서 진행시키는 자가 나다. 누구냐고 물었니? 나는 나야. I will be who I will be. 되어질 것이 곧 나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가 내가 이걸 얘기하면 너희는 들을 수 있어 무슨 말씀이시죠? 이제 경험하게 될 거야. 머리가 아니고 삶으로 언약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세야 이제 삶으로 네가 나를 경험하게 될 거야. 구석구석마다 광야에서 그 목마름 속에 굶주림 속에 추위 속에 더위 속에 내가 너희를 어떻게 출애굽 시키는지를 온 삶으로 경험하게 되게 만들어 버리는 내가 나야 라고 설명해 주시는 거예요.

여러분 이 “하야(hayah)”라고 하는 없는데 존재해서, 생성돼서, 유지, 강화, 지속된다라고 하는 이 “하야” 동사의 특징이 창세기에서 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할 때 쓰였던 비동사 맞아요. 죽음이 없었어요. 따먹는 순간 뭐가 창조가 뭐가 이 세상으로 팍 들어와야 돼요 죽음이 없다가 죽음이 와야 돼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돼요? 존재해서 생성돼서 유지 강화 지속돼서 쭉 가야 돼요. 여러분 그 첫 번째 사건이 어떤 사건이 창세기 2장 17절에 “정녕 죽으리라”고 했던 그 말이 이제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요?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누구를 죽여요? 아벨을 죽음도 없던 그 속에 이제 죽음이 시작되기 만드는 그래서 계속 진행되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 성경에 무드셀레가 몇 세를 살았고 아담은 몇 세까지 살았고 노아가 몇 세까지 살았다고 얘기하지만 그 끝은 다 뭐예요? 죽었더라요? 구약은 다 죽었더라요. 신약은요? 태어났다예요. 모든 동사가 바뀌어요. 이쪽은 죽음이고 이쪽은 생명이에요. 이젠 죽어가는 거예요. 죽음의 하야가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거예요. 여러분 이걸 누가 끝낼 수 있을까요? 있으라 하심에 그대로 되니라의 이 무서운 말씀이 어떻게 진행되느냐 여러분 여기도 한번 같이 보실까요?

 

[벧후3:7/쉬운성경]

7 또한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 지금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불로 멸망당할 것인데,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역한 사람들과 함께 멸망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지구 종말은 핵 전쟁일 거야. 자연 재해일 거야. 기후 변화일 거야. 얘기하지만 주님 뭐라고 하시냐면, 동일한 말씀이 세상에 하늘과 땅을 지키고 붙잡고 있어. 그 말씀이 그만이라고 딱 얘기하는 순간 지구는 끝이야. 지구 종말은 하나님한테는 무엇으로 시작이 되는 거예요. 그냥 멈춰라는 그 한마디에 이제 다 멈추겠다라는 거예요. 말씀이 그렇게 하겠다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 하나님의 선포가 죽음의 하야가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진행되고 있어요. 누구만 바꿀 수 있으시다고요? 하나님만 바꿀 수 있으세요 그래서 이 땅에 오셔서 법대로 자기가 명령한 그 법 그대로 지키시면서 죽음을 다 껴안으신 분이 계세요.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 그 죽음의 하를 온몸으로 받아가면서 죽어가신 분이 계세요. 누구 예수님 그리고 그분의 입에서 어떤 말씀이 선포되요. 어떤 삶이 선포되고 있는지 같이 한번 읽습니다.

 

[28:6]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먼저 본인이 죽음을 이겨버리세요. 그러면서 어떻게 선포하시는지 같이 읽죠.

 

[8:2]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또 한 번 읽습니다.

 

[3:15]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안 죽어. 영원히 살아 죽음의 “하야” 앞에 생명의 “하야”를 “영원히 살아”로 선포해 버리시는 거야. 죽음의 어둠 속에서, 아니 영원히 산다고 그 생명을 이 땅 가운데 확 펼칠 내가 나야. 영원히 살게 하는 걸 잊게 만든 유지, 강화, 지속돼서 영원히 살게 만드는 나야. 여러분 그래서 세상 떠날 때 우리 당당해야 돼요. 같이 읽습니다.

 

[20:6]

6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영광 이 영광을 아니까 이 영광과 이 땅 가운데 목숨을 쾌락을, 죄악을 바꾸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부활하신 생명이신 예수를 머리로 알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도 없고, 그래서 귀신 같은 믿음이 너는 장로잖아 알 거 다 알아라고 속인단 말이에요. 여러분 예수님이 나의 함께하시는 것이 기준 되길 바라는 거예요. 생명력은 질병을 이깁니다. 아이들이 열이 펄펄 나도요. 벙긋벙긋 웃으면서 뛰어다니고 땀 뻘뻘 흘리면서 활동하면 그 아이는 내일 낳습니다. 근데 미열인데 시들시들하고 있으면 그 아이는 진짜 아픈 겁니다. 여러분 생명의 하야가 우리 영혼 속에 나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있기를 예수님으로 축복합니다. 뚫고 나갈 권능 막을 수 없는 누가 막을 수 있는가 한번 막아보라고 하는 거 아니겠어요? 이 생명을 너희들이 한번 먹어보라는 거 아니겠어요? 내가 뚫고 나갈 테니 보라는 거 아니겠어요? 애굽 막아보라고 해, 광야 막아보라고 해, 가나안 땅 막아보라고 해. 내가 뚫고 나갈 테니까, 그 예수가 내 안에 있는 거 아니겠어요? 그 언약이 내 안에 들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이 말씀이 나에게 머리로 왔다고요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생명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거죠. 우리 한번 같이 선포하죠.

 

[6:40]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정말 봉지에 담아서 그분의 이렇게 화장한 그 죄를 이렇게 넣는데요. 하나님 이게 내 믿음입니다. 이 재가, 요 뼛가루가 부활해서 영원히 산다는 게 바로 그게 내 믿음입니다. 여러분 사도신경 고백하실 때마다 정말 영혼 속에서 밀려오는 마음으로 고백했으면 좋겠어요. 다시 사는 것과 다시 사는 것과 다시 사는 것과 그러면 이 땅을 어떻게 살겠어요? 우리가 영원히 다시 살 곳이 있다면 내가 이 땅에 거룩을 향해 나가라고 하시는 주의 부르심 앞에 사명 감당하라고 불러주셨으니 주여 이 땅에 그 사명 감당케 하옵소서. 여러분 이 땅은 고난이 있어요. 그 영광을 누리기 위해 고난도 함께 참여하라고 그랬어요. 명절날 나는 편할 거야라고 하는 굳은 의지를 갖고 가시면 모든 것이 불편할 거예요. 주여 나는 고난을 받으리라. 이 고난을 뚫고 주 앞에 서리라. 그 순간 만나기 싫은 사람, 만나기 싫은 모임, 귀찮은 모든 상황 속에 복음을 전하고 인도를 받겠다고 결단하고 나가실 때 하나님 함께하시면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므두셀라는 900세까지 살았어. 90세까지 우리는요 영원히 살아요. 그래서요. 바울이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미련하심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고 그들은 우리를 부러워한다고 여러분 우리의 기쁨은 거기에 있는 거예요. 예수가 생명인 영원한 생명인 그 예수에게 우리의 기쁨이 있기를 축복하는 거예요. 우리가 목숨이 떡 끊어지는 순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거 아니겠습니까? 존재 생성 강화 유지시키시는 그 하나님이 어떻게 언약을 그렇게 진행시켜 나가시는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같이 읽죠.

 

[18:14]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나는 누구예요? 네가는 누구예요? 하나님이 내게는 누구예요? 아브라함이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로 돌아오겠대요. 그러면 사라한테 누가 나올 거래요? 아들 아들 누구 이름 뭐예요? 이삭이 나올 거래요. 그러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가정에 태어난 것은 어떤 사인이에요? 누가 오신 거예요? 하나님이 아브라함 속에 훅 들어와 버리신 거예요. 이제부터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잇는 그 거룩한 계보는요. 멈추지 않고 흘러갑니다. 우리가 이걸 구속사라고 부르는 거예요. 하나님의 구원을 이 땅 가운데 펼치는 역사가 이제 이걸 뚫고 들어왔다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시작하시는 거예요. 일부러 누굴 찾으셨어요? 애도 못 낳고, 나이도 들었고, 종 통해서 애를 낳았더니 주님이 아니라고 그러시고, 내 몸에서 나 어떤 기미도 없고, 내 아내도 나도 아무것도 안 되는, 무 같은 제로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내 몸에 일부러 그 속에서 생명을 집어넣으셔서 내가 했다는 말을 한마디도 할 수 없도록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밖에 할 수 없도록 우리가 그 속으로 하나님의 생명을 집어넣는 거 아니겠습니까? 남자 없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한 분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바울이요. 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갈라디아서에서는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지 같이 한번 읽어봐요.

 

[3:14-16]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의 복이 뭐예요? 누가 오시는 복이에요? 예수 오시는 복이죠. 아들 못 낳는데 아들 낳았어 너무 좋아 그것도 복 맞는데 그 아들이 예수 모르고 죽어가면 사명 감당 못했으니 그게 무슨 복이냐 이거예요. 아브라함의 복은 누가 오시는 복이에요? 예수님 들어오시는 복이죠. 그래서 이걸 이렇게 얘기합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 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르켜 내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 내 자손이면 이삭이어야 되는데 이삭이라고 쓰고 예수라고 읽는 거예요. 예수가 생명이신 예수가 그 속에 흘러가니까 결국 하나님이 온 인류에게 죽음을 멈추고 생명의 하야로 바꿔버리실 누구를 보내시기를 예수 그리스도 보내시기를 소원하면서 지금 아브라함을 건드리시고 모세에게 출애굽 시키시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 임하시는 그 과정 속에 모세를 부어 쓰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내가 모세야 내가 그야 영원한 인류의 저주를 끊어버리고 생명으로 바꿔버릴 구속사를 이 땅 가운데 집어넣고 예수가 오게 해서 모든 인류를 살려버릴 내 거룩한 영혼 전부터 영원 후까지 가는 나의 계획을 선포할 내가 난데 내가 그 중간에 내가 너를 쓰고 싶어 내가 너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니가 다 들을 수 있을까? 모르죠. 모세 다 모르죠. 그러나 물으니 가르쳐는 주세요. 오늘 저희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 건 66권의 성경이 왔고 성령께서 가르쳐 주시니 이만큼 알 뿐이에요.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나는 나야 내 언약은 내가 지켜라고 얘기하시는 그 음성을 우리 가운데 들려주시고 내가 너를 그 중간에 쓰고 싶어라고 부르시는 사명을 깨닫게 하시고 그 생명의 하야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발동하고 드러나는 은혜를 경험시켜 주시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복하는 거예요.

 

[질문]

- 지금 주의 말씀이 살았고 지금도 역사하는 말씀으로 받아들이세요?

- 아니면 주의 말씀은 예전에 좋은 말씀이고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단은요. 야 그냥 안다고 해 그냥 그냥 안다고 하면 되는 거야. 그냥 그냥 너희는 그냥 아멘으로 끝나고 삶에선 그렇게 안 살아도 돼. 그거는 저 유명한 사람들 간증 다니엘 기도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이 하는 거야 라고 하는 상관없게 만드는 그 마귀와 귀신의 전략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거예요. 마지막입니다. 같이 한번 읽죠.

 

 

3. 하나님의 역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런 질문드리고 싶어요. 그렇게 스스로 모든 걸 다 하실 분이면 그냥 혼자 하시지. 왜 떨기나무에 불을 붙이시면서 모세를 기다리고 계실까요? 그것도 금방 오시는 것도 아니고 40년 기다렸다가 나타나시는 이유가 뭘까요? 오늘 새벽 큐티 말씀에 이적과 표적을 보여주시는 베드로가 이렇게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물고기들 한 마리도 못 잡는 베드로에게 두 배가 가득 잠기도록 만드신 이적을 보여주신 예수님이 모습 보이시죠? 오늘 새벽 큐티 했어요. 같이 한번 읽어볼까요?

 

[5:8-11]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데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으니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내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이적과 표적을 주시는 건 놀래라고 하시는 거예요. 놀라고 놀라고 두려워하도록 그래서요 누구 따라가도록 예수 따라가도록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적 보여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은 이적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이 땅이 이렇게 창조되게끔 하신 그분에게 이적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여러분 신명기 8장 2절 한번 읽어볼까요?

 

[8:2]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내가 광야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쉬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40년 동안에 아침마다 뭐가 내렸어요? 만나와 외출하기가 물이 터지고 불기둥이 구름 기둥이 아침마다 이적이에요. 아침마다 그걸 기억하래요. 왜요?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내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말씀 지키게 하려고 보여주신 거예요. 합격했어 합격했어 얘가 안 되는데 주의 은혜로 합격했어.
소아 걔가 예수 안 따라오면 무슨 상관인데요? 귀신은 뭐 한다고요? 예수와 나를 뭐 상관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적 딱 보고 이야 그리고 주님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떨기나무요. 왜 이적 보여주세요? 그거는 모세를 이야기하는 거고 이스라엘을 얘기하시는 거예요. 그러나 그걸 통해서 뭘 얻고 싶으세요? 이제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그 고백하기를 원하시고 이제 주님이 말씀하시면 신발 벗고 듣겠습니다. 주님 따라가겠습니다. 그 고백을 얻기 위해서 그걸 보여주신 거지 다른 건 아니잖아요. 여호수아가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했던 고백 우리 맨 마지막 굵은 줄만 읽어볼까요?

 

[24:15]

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 이거 하나야 난 누구 따라가리라. 생명의 하야이신 하나님 따라가리라. 그분의 통로가 되리라. 그거 하려고 이적 보여주시는 거예요. 40년 가난한 정복 전쟁 여리고가 무너지고 홍해가 갈라지고 해와 달이 서고, 남방 연합군, 북방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다 승리하는 그 이적은 뭐예요? 나와 우리 집은 여호와를 섬기리라. 여러분 애굽의 역사 속에 애굽이 10가지 재앙 당할 때 어마어마한 엄청난 역사가 일어났잖아요. 그 이 엄청난 역사를 보고 애굽 사람들은 어떻게 됐어요? 물론 몇 명은 따라 나왔어요. 그러나 그 나머지들은 어떻게 됐어요? 거기서 다 심판 당했어요. 광야에서 엄청난 역사들을 경험했어요. 그래서요. 그분들 다 어떻게 됐어요? 영어 성경에는요. 흩어졌다가 스켈레트 다 다 뿌려졌다. 죽어서 다 나뒹굴었다고 돼 있어요. 이적과 표적을 매일 같이 봤는데 다 죽었어요. 왜요? 주님 따라갈 마음이 없어요. 생명의 하야를 듣지 못하고, 여러분 하나님이 왜 모세 없이 일을 하실 수 있는데도 모세를 이렇게 기다리시고 이적을 보여주시면서 자꾸 오라고 하실까요? 글쎄요. 이건 또 하나의 엄청난 주제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그러시는가 봐요. 스스로 모든 걸 다 하실 수 있는 생명의 하야를 갖고 계신데도 아무것도 못하시는 분처럼 기다리세요. 난 니가 와야 돼. 그래서 왜요? 함께 동역하고 싶어서 이 영광을 누구와 나누고 싶어서 나와 나누고 싶어서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움 당하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나와 같이 일하자. 나와 같이 일하자. 하나님 나 기다리십니다. 하나님 다른 거 아니요. 저 기다리십니다. 저 한 사람 기다리지 마. 난 너 기다려. 내가 니 속에 들어가서 너와 함께 일하고 싶어. 여러분 주님을 기다리는 그 한 사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1월달부터 3월까지 4월달까지 걸릴 수 있는 표는 치우침 없는 걸음으로 해요. 여러분 이거 이 걸음이 내려가고 나서 아마 저희가 7-8월 달 쯤에는 “The only one” 바로 그 한 사람 그게 우리의 표어가 될 거예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로 그 한 사람, 내가 너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그 한 사람 되기를 예수를 축복해요.

 

[질문]

- 이적과 표적에 빠져서 주님의 마음과 말씀을 놓치고 있지 않습니까?

- 여러분 나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 나를 부르시는 주님 앞에 나는 어떻게 말하고 반응할 수 있을까요?

오늘 설교 준비 이렇게 게을러서 참 일찍일찍 못 합니다. 간신히 합니다. 간신히 근데 그런 생각해 봅니다. 간신히 하고 있는 그래서 졸았다가 배고프다고 또 딴 데 갔다가 그 adhd의 특징 있잖아요. 공부하려고 펼쳐놓으면 청소하고 싶고 청소가 끝나면 옷장 정리하고 싶고 옷장 정리하면 쓰레기 비우고 싶고, 그리고 난 시간이 없다고 제가 그러거든요. 그런 저를 옆에서 이렇게 보시면서 그래 해 내가 너 기다리고 있어 도대체 저 없이는 안 돌아가 아니요. 하나님 하나님이라 하시죠. 근데 마치 아무것도 못하신 것처럼 나 니가 필요해. 나 여기 기다리고 있을게. 나 여기 기다리고 있을게. 완규야, 나 여기 있을게. 여러분 모세를 기다리고 기다리십니다. 앞으로 다 읽지 않았지만 모세가 얼마나 주님을 거부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꼴을 다 받아내십니다. 여러분 주님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 예수를 그 하나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축복하고 그래 나를 그렇게 기다리시니 내가 그분 마음에 드는 그 한 사람으로 나가리라 소망하시며 이 거룩한 복된 명절을 주님과 동행하며 내 옆에 계시고 내 안에 계신 주님과 그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찬양하며 주 앞에 나갈까요.

 

(찬양 : 예수 더 알기 원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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