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타이핑] 온누리교회 이상준 목사 | 주일예배 느헤미야 5:1-13 | 멈추어 서로를 돌아보아야 할 때 [2020.09.26] |
[느5:1-13]
1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5 우리 육체도 우리 형제의 육체와 같고 우리 자녀도 그들의 자녀와 같거늘
이제 우리 자녀를 종으로 파는도다 우리 딸 중에 벌써 종된 자가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남의 것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도다 하더라
6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였으나
7 깊이 생각하고 귀족들과 민장들을 꾸짖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높은 이자를 취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그들을 쳐서
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2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당신의 말씀대로 행하여 돌려보내고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아니하리이다
하기로 내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그 말대로 행하겠다고 맹세하게 하고
13 내가 옷자락을 털며 이르기를 이 말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두 하나님이 또한 이와 같이
그 집과 산업에서 털어 버리실지니 그는 곧 이렇게 털려서 빈손이 될지로다 하매 회중이 다 아멘 하고
여호와를 찬송하고 백성들이 그 말한 대로 행하였느니라
지난 주의 느헤미야서 4장의 내용이 외적인 위기의 내용이었다면 오늘은 내적인 위기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은 성벽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죠. 더 심각한 문제는 공동체 자체가 무너져 있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주변 민족에게 수탈을 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자기 동족 에게도 수탈을 당했던 것입니다. 부자가 빈자의 얼마 있지도 않은 재산을 탐내서, 그것을 빼앗은 약육강식의 사회 구조였다라는 것이죠. 그러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어떤가? 말씀을 통해서 비춰 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느5:1-4]
1 그 때에 백성들이 그들의 아내와 함께 크게 부르짖어 그들의 형제인 유다 사람들을 원망하는데
2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와 우리 자녀가 많으니 양식을 얻어 먹고 살아야 하겠다 하고
3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가 밭과 포도원과 집이라도 저당 잡히고 이 흉년에 곡식을 얻자 하고
4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밭과 포도원으로 돈을 빚내서 왕에게 세금을 바쳤도다
성벽은 절반정도 쌓여 있었고 주변에 공격에도 지혜롭게 대처를 했지만, 오히려 더 큰 문제는 내적인 문제였습니다. 성벽을 완성한 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한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부재해 있는 이 당시에 사람들, 유다인 들,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이기심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 그런 공동체는 언제 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들의 문제점은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상당히 유사한 것이죠. 이들의 문제점을 본문이 이야기합니다.
첫 번째는 기본적인 생계 위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꿈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또 뭐 성공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밝은 비전이 있어 사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 그런 인생은 비참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두 번째는 오늘 3절에도 나오는 것처럼 흉년으로 인해서, 기근으로 인해서 채무를 질 수밖에 없었다. 농경 사회의 잖아요. 수확이 평년 수준 반대도 자급자족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밭에서, 내가 논에서, 내가 과수원에서, 재배한 것 내가 먹으며 그것으로 자급자족하는 거예요. 그러나 흉년에는 저장해둔 곡식이 없기 때문에, 결국엔 저장을 많이 해 둔, 창고에 곡식이 가득 쌓여 있는 사회적인 부유층에게 빚을 질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죠.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우리 사회에도 참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올해와 같이 전세계적인 펜데믹 위기 가운데 처해 있으면 이것은 어떤 한 나라의 위기가 아니잖아요?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전 세계적인 경제 기근인 것이죠. 직장을 잃고 가게들이 문을 닫고 빚을 지지 않고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거기에다가 자연재해가 또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난 여름철에 여러 차례 태풍이 지나가면서 수해를 당한 농어촌지역, 농어촌지역의 주민들 뿐만아니라 도시민들까지, 전부 심각한 타격을 입고 이 타격을 수습 하기도 전에 계속해서 경제적인 이 침체 상황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바사 제국의 내야 하는 세금의 부담도 있었다. 곡식을 얻기 위해서 한 빚을 지는 것이 아니라 세금 낼 돈도 없어서 빚을 져야 했다라는 것이죠. 네 번째는 그래서 결국에 소중한 자녀들을 종으로 팔아야만 했다. 자식을 종으로 팔아야 하는 그 부모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식을 뭐 공부를 못 시키거나, 자식이 자신의 진로를 위해서 갈 수 있도록 준비를 못 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그 자식을 돈을 받고 팔아야 되는, 곡식을 받고 팔아야 되는 입장이었다. 다섯 번째 사회경제적 상위 계층이 고리대금업을 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어지는 그 7절을 보면 이 사람들이 귀족들과 관리들이었다라고 되어있어요. 말하자면 정책을 세우고 백성들을 위해서 봉사를 해야 되는 사람들이, 그 가난한 백성들을 상대로 그들의 없는 돈을, 마저 긁어내는 그런 비즈니스를 했다라는 것이죠.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이 위기 상황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두가 그런 얘기 많이 합니다. 코로나가 빨리 종식되었으면 좋겠다. 이 어려운 위기를 어떻게든 잘 버텨 냈으면 좋겠다. 경제가 빨리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이렇게 희망 사항만 읊조리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죠. 느헤미야와 같이 당시에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과 같이 구체적인 액션이 필요한 것입니다. 3가지 정도로 보겠는데요.
그 첫 번째는 사명 헌신하는 동안에도 사람을 돌봐야 합니다.
사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인가? 사명 지향적인 사람, 사람 지향적인 사람이있죠. 근데 우리의 사명이 결국에는 사람입니다. 사실 아직 성벽 재건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죠. 중간 높이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위협도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구요. 그렇다면 공사한지 과연 며칠 됐을까? 이제 6장으로 넘어가 보면 6장 15절에 52일만에 완공을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절반 높이니까, 단순히 수학적으로 52일을 둘로 나누면 한 26일 정도? 아직 한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을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느헤미야 입장이라면 어떻게 얘기를 할까요? 원망하는 백성들에게, 야. 일단 성격부터 완고하고 이제 우리 벌써 한달도 안되서 절반을 쌓지 않았느냐? 한 달만 더 기다려 달라. 그리고 나서 성벽 완공하고 이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 하면 어떻겠느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요? 보통 이것이 사명 지향적인 사람들이 자주 놓치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도 상당히 사명 지향적인 사람이었죠. 그가 1차 선교여행을 할 때 중도하차 했던 마가 요한을 자기 팀에서 배지시켜 버렸어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다시 수용 해주었습니다, 사명 지향적인 리더들은 일은 해낼지 모르지만, 중요한 사람을 놓칠 때가 많은 것이죠. 역사상 가장 빨리 세계를 제패했던 사람 중에 알렉산더 대왕 아닙니까? 그가 불가 3년만에 전 세계를 제패했어요. 근데 병사들이 너무나 지쳐 있었는데도 멈출 줄을 몰랐습니다. 그가 33살의 요절하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가지 사망설이 있는데 측근들이 암살 독사를 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거예요. 왜 그럴까요? 사람을 놓치는 것이죠. 내가 하고 싶은 일, 야망, 꿈만 생각하고 사람을 놓쳤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가요? 여러분 일이 중요 하십니까? 관계가 중요하십니까? 사명인가요? 사람인가요?
지금 느헤미야의 사명은 성벽을 세우는 것이 잖아요. 우린 단순하게 그렇게 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명은 성격을 세우고 그 안에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죠.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볼까요? 교회는 부흥을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거시적인 개념이라면, 미시적으로는 성도들 한사람 한사람들이 살아나야 되는 것이죠, 국가로 보자면 경제가 회복돼야 하지 않는가? 맞습니다. 그러나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리더들은 이런 그 세부적인 이야기들을 하면,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해요. 근데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죠. 교회 목회 사역을 할 때도 내가 지금 전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데, 지금 우리 상황이 이렇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성도들이 있으면 발목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목회자들이 많아요. 제가 어제 설교 준비를 하는데 하나는 성도님이 문자가 왔어요. 목사님 저희가 요즘 계속 영상으로 설교를 보고 있는데 거실에 있는 큰 모니터 화면으로 목사의 얼굴을 보면 목사님 실제 얼굴보다 네 배 크기로 봅니다. 좀 웃어 주세요.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속으로 오늘 본문이 느헤미야가 백성 지도자들을 혼내는 내용인데 내가 웃어야 된다니,
근데 여러분 나는 해야 될 일이 있다. 목사로 설교 해야 될 내용이 있지만, 여러분 그 예배를 드리고 성도들이 살아야 되지 않겠어요? 그렇다면 그 성도들이 원하는 걸 해야 되는 것이죠. 그 제가 아무소리, 토달지 않고 내 말씀에 순종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말씀 드렸어요.
여러분 한국사회에는 사명 지향적인 사회입니다. 자녀들은 학업에서 성취를 해 내야 되고, 아빠들은 직장에서 성취를 해야되고, 엄마들은 또 육아에서 나름 성취를 해 내야 되고, 교회는 부흥을 시켜야되고 국가는 경제를 발전 시켜야 되고, 모두가 이런 사명의 목을 매는 거에요. 그러다 보면 서로를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코로나 위기가 우리로 하여금 시간을 멈춰 서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이 멈춰선 시간에 서로를 돌아보고 있느냐? 라는 것이죠. 여러분 자녀들이 학교와 학원으로 정신없이 돌아다닐 때 차분하게 앉아서 얘기할 시간도 없었잖아요. 그럼 요즘과 같이 온라인 수업을 많이 하는 때, 자녀들과 따뜻한 대화를 나누고 게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이 갈등 하고 계십니까? 아빠들이 야근에, 또 출장에, 가족들이 얼마나 그리워 씁니까? 그러면 재택근무를 하는 이 기간 동안, 좀 따뜻하게 가족들을 섬기면 얼마나 좋습니까? 오히려 더 많이 갈등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이 코로나 기간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다 집에 머물면서 가정폭력이 급증했다는 안타까운 슬픈 뉴스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가?
온라인 수업을 하고 있지만 너는 더 집중해서 공부를 해야 돼, 넌 좋은 성적을 내야 돼, 넌 대학을 가야 돼, 계속해서 일만 얘기하고 있지 않나요? 사람을 돌봐야 될 때 우리는 일만 얘기하고 있지 않는가? 경제가 어려워도 돈은 벌어야 되지 않느냐? 그런 당신은 육아를 해야 되는 것 아니냐? 당신이나 당신 책임을 잘해라. 서로를 평소보다 더 다그치며 살고 있지 않은가요? 여러분 코로나로 인해서 우리가 어려움을 겪었던 초반에는 좀 그런 갈등들이 있었어도, 여러분 이제 코로나가 굉장히 장기화 될 것인데, 언제까지 계속 그렇게 가정에서 다 투시겠습니까?
사실 뭐 다른 사람 이야기 할게 아니라, 저도 상당히 사명 지향적인, 일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새벽에 나와서 사역하고 교제 편집하고 교제 저술하고 뭐 그러다 보면 한밤중에 들어갈 때 참 많아요. 작년에 아내가 저한테 그러더라구요. 제가 성경 통도 한참 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때, 당신이 시내산에 올라간 줄 알았다. 하나님 말씀 받으러 어디 시내산 올라가 내려오지도 않고. 그런데 급기야 올해 이제 코로나아가 터진 거예요. 그런데 8월 중순 이후로는 한달 거의. 한 달 동안 대면 사역을 교회가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잖아요. 이렇게 저희 아내가 그러더라고, 아니 당신은 대면 사역도 없는데 왜 계속 늦게 오느냐고. 그저 요즘 회개하고 집에 일찍일찍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두세 번 정도는 저녁 식사 뭐 가짓 수는 많지 않아도 제가 요리해서 아내 대접하고 있습니다. 같이 성경 읽고 같이 산책하고 물론 이제 좀 시작했어요. 제가 하도 교회의 뭐 하나님 나라의 미쳐서 사니까 저희 안에는 저한테 일 중독이다. 아니다. 나는 사명 중독이다. 뭐 그렇게 많이 이야기했던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같은 시간 정말 멈춰 설 수밖에 없는 시간에 가족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 힘들다고 소리를 치면 그 사람부터 건져 내야 되는 거예요. 아니, 사람이 저기서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늪에 빠져 가고 있는데, 아내가 이 일부터 좀 마추고 나서 해줄 게 아니, 너도 그러고 있지 말고, 너도 너가 맡아서 해야 될 일을 좀 해야 되는거 아니야? 지금 사람을 살려야 될 때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람을 회복해야 되는 시점에서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누고 싶은 것은 8절부터 10절에 말씀인데요.
[느5:8-10]
8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이방인의 손에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우리의 힘을 다하여 도로 찾았거늘
너희는 너희 형제를 팔고자 하느냐 더구나 우리의 손에 팔리게 하겠느냐 하매 그들이 잠잠하여 말이 없기로
9 내가 또 이르기를 너희의 소행이 좋지 못하도다 우리의 대적 이방 사람의 비방을 생각하고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행할 것이 아니냐
10 나와 내 형제와 종자들도 역시 돈과 양식을 백성에게 꾸어 주었거니와 우리가 그 이자 받기를 그치자
두 번째는 우리가 적용해야 될 것은 건강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사회의 적용해야 됩니다.
여러분의 기업에, 일터에, 교회에, 이 나라에, 적용해야 됩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자기 자식까지 종으로 팔아야 되는 비참한 지경이었어요. 왜, 그렇게 됐는가? 시대적으로 기근에, 또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모든 사회 기반이 무너져 있는 그런 시대에, 구조적인 문제, 그러니까 물가는 상승하고, 경제는 지금 경색되어 있는 시기에, 게다가 돈을 꾸고 양식을 꿀 수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지도자들이 고리대금을 했기 때문이에요. 모세오경에는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가? 어렵고 가난한 이웃에게 돈을 빌려줄 때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한 것이 토라의 말씀입니다. 두 구절만 보겠습니다. 많은 구절이 있지만 출애굽기 12장 25절 같이 읽어볼까요.
[출12:25]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줄 때, 아니 원금도 지금 갚을 능력이 없는데, 그것의 얹어서 이자까지 그것도 고리로 얹어서 그러면 그 사람이 완전히 궁지에 몰리고, 생존을 위해서 돈을 꾸고 양식을 껐다가, 정말 죽음을 생각하는 지경까지 가게 되잖아요. 그 성경은 그 사람에게 이자 받지 말라는 거에요. 놀라운 이야기죠. 레위기 25장 37절을 읽어볼까요.
[레25:37]
37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지금 돈을 꾸어 주고 그 양식을 부어 주는데, 그나마 내가 이 사람이 상환할 능력이 좀 불안불안 해도 보장이 안 되도, 그 이자를 받는 그 이기 때문에 꿔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내가 꿔주는 행위를 하면서 이자를 받지 않으면 꿔주면 뭐하러 꿔주냐는 거죠. 놀랍게도 토라는 돈이나 양식이나 물건을 빌리는 행위 우리 뭐 대출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이렇게. 대출이 가진 자를 위한 행위가 아니라 가지지 못한 자를 위한 행위어야 한다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놀랍죠. 다시 말해서 대출은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한 구제 활동에 개념으로 토라는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진자의 배를 불리기 위해서 없는 자의 지갑을 터는 행위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주변에 이방 민족들에게는 이런 개념이 전혀 없었어요. 전무합니다. 오직 성경에만 나오는 개념이에요.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를 보십시오. 가지지 못한 자에게는 대출해 주지 않습니다. 제 2의, 제3의 금융권에 가야만 간신히 제출을 받을 수 있고, 그것도 내려 갈수록 고리가 적용되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 사람의 생명과 존재를 옭아매는 곳이죠. 성경에서는 이웃이 정말 가난해서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양식을 먹는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7년마다 안식년이 되면 자유인이 되게 해 줘야된다. 돈이 없어서 양식이기 없어서 토지를 팔게 되었을 지라도, 그 안식년이 7번 반복한 마지막에 또 다른 1년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이 되면 토지를 돌려줘야 된다. 파격적이지 않습니까? 그 성경이 이야기하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본 생존권 보장 이라는 것은 현대의 발전 돼 있는 법 체계에서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파격적으로 보장해 주시는 기본 생존보장권이었던 거에요.
하나님은 이런 법 제도를 사회의 적용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지금 뭐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어려운 상황입니다. 일부 호황을 누리는 업종들도 있겠죠. 의료 관련된 업종들, 일부 업종들은 호황을 누릴 수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어렵잖아요. 그럼 지금은 어떤 시기인가? 가난하고 힘든 국민을 대상으로 해서 그들의 지갑을 터는 비즈니스를 할 때는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은 내 이익보다 타인의 유익을 우선으로 해야 할 시기라는 것입니다. 일단 나 살고 보자. 이런 마음이 위기 상황에 생기지만, 그런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은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될 시기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국가는 국민을 옥죄기보다는 국민을 다독여야 됩니다. 임대인은 인차인을 몰아세우지 말고 살려내야 됩니다. 특별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크리스찬 임차인 대인들은 임차인을 몰아세우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그들을 살려 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부모의 위치도 마찬가지입니다. 크리스찬 부모들 자녀들을 다그치고 왜 너는 온라인 수업을 하면서 그렇게 집중을 하지 않느냐. 어른들이 성인이 재택근무를 해도 집중하게 쉽지 않아요. 자녀들을 다그칠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격려해야 될 때라는 것이죠.
시대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이 정의사회 구현을 많이 외치기 돼 있어요. 오늘날 이 사회도 정의사회 구현을 많이 외칩니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가 도대체 무엇으로 구현 되는 것일까요? 법으로 구현이 될까요? 엄격한 잣대에 법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처벌해 내면,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 될까요? 아니요. 정의로운 사회는 그런 걸로 구현되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역설적으로 정의로운 사회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구현되는 거예요. 법을 아무리 만들어도 법을 피해가는 사람들, 그 법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나오게 돼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 강 파악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정의로운 사회가 구현되는 거예요. 그래서 8절과 9절에 말씀 한 거죠. 8절은 긍휼의 마음을 이야기 한 것이구요. 9절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이야기 한 것입니다.
정리를 하자면 정의사회 구현은 인간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의 대한 신앙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인본주의적인 법률과 제도는 아무리 정의감이 충만하다 할지라도 사람의 마음에 사랑의 불을 붙여 주시는 못 한다고요. 그리고 하나님의 절대 기준의 순종하고 자는 자원하는 마음도 일으키지 못해요.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 두 가지의 호소 안 거에요,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 하십시오. 여러분 자녀들도 그렇고요. 회사에서 다툼이 있는 직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우지 마라. 싸우지 마라. 얘기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그러나 서로를 사랑하게 되면 그게 유일한 해법입니다. 바르게 살아라. 바르게 살아라.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일탈 하고 싶어하는 사람 잡을 방법이 없어요. 그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경유 하게 되면 그게 유일한 해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11절 말씀 같이 읽겠습니다.
[느5:11]
11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저당 잡았던 밭과 포도원과 올리브 농장과 집들을 바로 돌려주고 그 다음에 그들에게 대출 해줬던 그 양식에 100분의 일을 왜 100분의 1일까요? 1% 이자인거요. 월 1%, 년 12% 이자를 받았던 이자. 다 돌려주고 그리고 12절에 보면 제사장을 불러다가 하나님 앞에서 맹세하게 만들었어요. 그 당신 정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이렇게 해야 된다. 하나님 앞에 언약을 맺고 맹세를 해라를 시켰어요. 오늘 본문은 13절까지 끝났지만 14절부터 1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느5:14-16]
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16 도리어 이 성벽 공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내 모든 종자들도 모여서 일을 하였으며
세 번째 우리가 적용할 것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섬김의 리더십을 보이셔야 합니다.
서번트 리더십이라고 하죠. 느헤미야가 단순히 성격 세우는 일꾼으로 온 게 아니잖아요. 대 제국 페르시아의 왕이 임명한 유다 총독이었다고 요. 게다가 12년 동안을 여기서 헌신하며 그 사회 재건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놀랍게도 총독의 녹, 녹이 뭡니까? 월급을 받지 않았다는 거에요. 근데 이전 총독 뜰은 페르시아 제국의 내는 세금, 총독이 받아야 되는 당연한 월급, 그 뿐만 아니라 충독이 부과하는 음식과 돈도 추징을 하는 게, 관례였다구요. 그래서 갈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 당연하게 추징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했어요. 총독 뜰이 그런 입장을 보이니까, 그 밑에 사람들 관리들도 다 백성들을 갈취 했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16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이런 고백을 하죠. 나는 땅 한 쪽도 사지 않았다. 이 무슨 얘긴가? 부동산 투기 하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폐허가 된 고국에 돌아와서 재건 사업을 하잖아요. 그럼 어느 구역을 재건하고 어디에 시장을, 마켓을 세우고 어디에 주거지를 두고, 부동산 정책을 본인이 결정 하니까? 어느 구역이 부동산 오를 걸 알 거 아니에요? 근데 나는 땅 한 쪽도 사지 않았다는 거예요. 여러분 크리스찬 리더십으로서 여러분의 삶, 여러분의 투자 원칙에 대해서 돌이켜 보십시오. 오로지 자신에게 맡겨진 성벽 재건의 사명에만 느헤미야가 헌신했다.
게다가 17절 이하를 보면 150명의 유다인 지도자들과 관리들을 자신의 상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거에요. 이 150명을 매일 먹였습니다. 12년 동안. 그런데도 그 백성들에게 그 음식을 공궤 하도록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얘기할 것 같아요. 아니 음식을 대접 말하면 되지않느냐? 돈 쓸 일도 없잖느냐? 일을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어떤 조직이나 회사도, 사람들에게 일을 많이 시키면서 밥도 먹이지 않는다? 그 진행하기 어려워요. 제가 대학청년을 5년 동안 맡아서 사역할 때 열정이 많고, 그러다 보니까 일을 정말 많이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함께 고생한 청년들과 교육자들 밥을 자주 먹였습니다. 뭐 수십 명 먹였어요. 그럼 어떻게 하는가? 저는 사역 외의 시간, 또 밤에도 짬을 내서 열심히 번역하고 강의하고 책 쓰고, 그 재정이 모이면, 또 먹이고, 주로 밥 먹이는데 다 썼던거 같아요.
느헤미야가 무슨 얘기를 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을 위에 이렇게 수고하는데 여러분도 좀 나한테 협조를 해줘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거나 요구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오히려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을 썼던 것 같구요. 아니 월급도 없었으니까, 자신이 페르시아에서 기반으로 해뒀던 그때 모아뒀던, 아니면 부모에게 받았던, 개인의 재정을, 자비를 들여서 쏟아부어 헌신을 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했는가? 18절 하반 절에 보면 이런 얘기 나옵니다.
[느5:18]
18 ...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이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었더라
당연히 요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들이 감당할 능력이 없고 너무나 부담스럽기 때문에, 여러분 느헤미야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여러분 제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여러분의 돕기 위해 온 것이지, 여러분에게 뭔가를 받으려고 온 곳이 아닙니다.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제가 이곳에 온 것은 여러분을 돕기 위해 온 것이지, 여러분에게 뭔가를 받아내려고 온 게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질문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아니 단 한번 사는 인생. 어떻게 살라고 왜 살라고 하나님이 보내 썼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올라서 더 많은 권력을 휘두르며,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내가 부리면 하나님께서 그래도 인생 참 경쟁적으로 잘 살았다. 그 칭찬해 주실까요? 천국문 앞에서.
저는 역사물. 영화, 예전엔 영화. 뭐 모든 종류 다 좋아하는데 요즘은 역사물 영화를 집중적으로 좋아한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못 보고 있지만 그 최근에 2004년도에 봤던 킹 아더라는 영화를 다시 봤어요. 물론 아더 왕의 대해서는 전설적인 존재냐? 그냥 사람들이 만들어낸 존재냐? 아니면 실존 인물이냐? 뭐 논란이 많지만, 이 영화를 한 보시면 참 좋을 것 같아요. 진정한 서번트 리버십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묵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영화입니다. 아더와 원탁의 기사들이 북부에 있는 로마인 가족을 구출해 내는 마지막 미션을 받게 되요. 그 미션을 수행하고 나면 이제 다 그들의 군인의 복무를 끝내고 자유로 몸이 될 수 있는 거였어요. 그런데 색슨족의 저 북쪽에서부터 진군해서 내려오면 공격해 옵니다. 근데 그들을 피해서 이 로마인 가족을 후송을 해야 되는데 그 영지 안에 있는 가난하고 굶주리고 병들어 있는 백성들을 포기를 못하고 아더가 그들을 데려 가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다 우리와 함께 같이 피난을 갑시다. 그러니까 곁에 있던 렌슬롯이, 도대체 뭘 하는 거냐? 색슨족이 밀고 오는데 코앞에 있는데 이제 데리고 가면 우리도 죽는다. 이게 로마 준 미션이냐? 아니면 아더의 미션이냐? 이런 질문을 던져요. 대답을 하지 않고 그 사람들을 다 결국에 구출해야 됩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에게 질문하는 것이죠. 나는 왜 존재 하는 가? 나는 이 땅에 왜 살고 있는 것인가? 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땅이 왜 보내셨나요?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여러분을 아낌없이 주려고 하는 존재 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당연하게 요구를 하고 받기를 원하는 존재 입니까? 부모로써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 아낌없이 많이 주셨죠. 그러나 내가 준 만큼 받고 싶은 미련이 여러분 마음에 생기기 시작하지 않습니까? 그 미련 하나님 앞에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늘 교회에서 리더십 강의할 때마다 던지는 질문이에요. 뭐 저도 늘 대답해야 되는 질문이고. 여러분 교회가 교인들이 목사를 위해 존재하니까? 목사가 교회와 교인들을 위해 존재 합니까? 당연한 거잖아요. 목사가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죠.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그러면 이것을 우리 성도님들 평신도 사역의 적용을 해본다면 순장, 순원들을 위해 존재하니까? 순원들이 순장을 위해 존재 합니까? 당연히 순장, 순원들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되고 나눠줘야 되는 것이죠. 그런데 맘에 안 되는 순원들은 안 나왔으면 좋겠고. 케어하지 않고 그런다면 이 구조는 꺼꾸로 된 것이죠. 하나님이 왜 당신을 이 땅에 보내졌는가? 하나님은 아낌없이 나누어 주라고 당신을 이 땅에 세우신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살라고 내가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것이 대단한 성공의 스토리가 되어서 하나님께 칭찬 받으라고 세우신 게 아니에요. 아낌없이 느헤미아와와 같이 나누며 살면 오늘 5장이 끝나는 마지막 19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해요.
[느5:19]
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나님 내가 이 백성을 위해서 이 선한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 기억해주시고 은혜는 하나님께 받겠습니다. 여러분이 선한 일을 하고 수고한거 사람에게 페이백 받으려고 하지 마세요. 상급은 하나님께 요구하십시오. 온 세상 사람들이 사회적인 상승 욕구가 있어요. 내 포지션이 상승 했으면 좋겠는 거예요. 말하자면 팔로워에서 리더가 되고 싶어요. 중간 리더에서 탑 리더가 되고 싶어요. 이건 뭐 크리스찬들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면 왜 그런 상승 욕구를 갔느냐는 거죠.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여러분 그 자리에 가야되는 것은 가장 낮은 겸손한 섬김을 하기 위해서요. 그때 세상이 움직이고 세상이 감동하고 편하 되기 때문입니다. 남을 누르기 위해서 가난한 자들의 돈을 착취 하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기회를 주시는 게 아니에요. 그런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오늘 본문의 13절 말씀처럼 하나님께 털리고 털려서 빈털털이가 될 것입니다.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질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누가 서로 크냐? 큰 자로 놓고 논쟁을 하니까,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 27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마20:25-27]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기도나눔]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섬기고, 나누고, 베풀고, 생명을 살리라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경쟁에서 멋진 인생을 살고,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보내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 가정에서 더 섬기겠습니다. 일터에서 더 섬기겠습니다. 내가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내 주변에 지쳐있는 사람들, 가정이 어려워지고, 경제가 어려워지고, 기업이 어려워진 사람들, 함께 붙들어주고 일으켜 세우고 가겠습니다. 하나님 이 시기가 느헤미야 리더십을 발휘하는 시기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를 감동하여 주옵소서.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중간기도]
사랑하는 주님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느헤미야를 본받을 본 받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기를 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 가길 원합니다. 우리가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하나님 우리는 거짓된 크리스찬 성공 스토리에 빠져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거짓된 크리스찬 성공 신화의 빠지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생명을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영혼을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기업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느헤미야처럼 사람을 살리고, 공동체를 살리고, 시대를 살리는 역사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섬김이 많은 영혼들에게 치유가 되게하여 주옵시고 회복이 되게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소망의 메시지와 음성이 되는 축복이 있게 하여 주셔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절망했던 사람들이 소망을 얻게 하시고, 무너졌던 공동체가 다시 힘을 얻어, 용기를 얻어, 일으켜 세워지게 해주셔서, 성벽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고,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무리기도]
사랑하는 주님 감사합니다. 더 겸손히 더 사랑으로, 더 섬김으로, 주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고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이 어려운 시기를 정말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함으로 이겨낼 수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한 가정, 기억 될 수 있도록 주여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상준목사님 설교] 바로가기 ↓ ↓ ↓ ↓ ↓
https://www.youtube.com/watch?v=fBUiGrbw8a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