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타이핑] 우리들교회 | 김양재 목사님 | 주일예배
창세기 4:1-7 |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세기 4:1-7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바로 1911년에 스탠포드대학에서 직접 교도소 세트를 지어서 빌립 짐바르도 교수가 스탠포드 과목 실험을 했어요. 그 평범한 대학생 특별히 건강한 대학생, 병력을 다 조사해 가지고 아주 건강한 평범한 이 대학생을 이제 그 자원자를 뽑아서 두 주일 동안 감옥 실험을 하게 했어요. 눈에 안대를 가려 가지고, 스탠포드 대학에 이렇게 세팅을 해 놨지만 이 학생들은 전부 다 그곳이 진짜 감옥인 줄 아는 거예요. 감옥하고 똑같이 세팅을 해 가지고 이제 인간이 극한 상황에 달았을 때 어떤 마음을 가지는가를 생각해서 이제 실험을 하게 되었는데, 참으로 특별한 의미가 담긴 유니폼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너무나 커서, 죄수복을 입은 사람은 그냥 저설 죄수처럼 위축감을 느끼게 되고, 또 간수복을 입은 사람, 곤봉 선글라스 낀 사람은 저절로 위압감을 주었어요. 그래서 흥미로운 사실은 둘째 날부터 참가자들은 진짜 교도관이 된 마냥, 행동하기 시작했고, 죄수들은 야, 이게 실험이 아니고 내가 진짜 죄수로 잡혀온 곳이 아니야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제 그래서 난동을 부리다가 교도관들에게 제압당하는 사건도 생겨났는데, 셋째 날부터는 그냥 교도관들이 완벽하게 무력으로 수들을 통지하게 됐어요. 독방에 가두거나, 독방에 가두거나, 스스로 체구를 고안하여 강제했으며, 구타도 발생했고, 불가 3일 전만해도 이들은 평범한 대학생들이었는데, 다섯째 날에 이르자 정신적인 충격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이 나와서 그 사람을 실험에서 빠지게 했는데, 그걸 보고 이 죄수들이 동요가 일어났어요. 그것은 이제 탈출한거다. 탈출한거다. 그러니까 막 동요가 일어나니까 이 교도관들이 내부 밀고자를 거기다 심어 놨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이제 의심과 불신 속에서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일부 교도관들이 죄수들을 성적으로 학대하기 시작했고, 교묘한 방식으로 이들을 고문하고 처벌하는 것이 이제 발견이 되었어요. 그러다 결국 집단 광기를 보면서 폭동을 일으키다가 두 주일 동안 실험하려고 하다가 닷세만 하고 이제 여섯째 날이 끝마쳤다는 거예요.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너무나도 광기가 일어나서, 폭동이 일어나서, 다 난리가 났기 때문에, 이 실험의 결과는 너무나 놀라웠어요. 불과 5일 만에 인간의 이상과 선한 의지가 마비되었다는 거예요. 환경이 얼마나 인간을 사악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실험은 단적으로 보여줬습니다.

 

특히 교도관 역할을 맡았던 이 학생들은 2차대전 당시 나치 히틀러가 유태인에게 가했던 체벌과 똑같은 방식을 고안해 낸 거예요. 푸시업을. 그래 가지고 벽으로서 있게 하고 그래서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 악마적 본성이 얼마나 정말 두려움이 들게 할 정도인지, 실험이 일으킨 가장 큰 파장은 진정한 휴머니즘은 이 땅에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상황에 의해서 악인이 될 수도 선인이 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한마디로 인간은 죄인이라는 거예요. 상황에 의해서 악했다 선했다 하는 것이 무슨 선한 것이 있겠어요. 제가 날마다 말했듯이 인생은 별 인생이 없다는 거. 이걸 아시고.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 죄인인 거예요. 죄인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믿으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죄인으로 선악 감먹고 죄인으로 출발을 했기 때문에 죄를 다스려야지 되는 거예요. 우리가 할 일은 죄를 다스려야 되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원죄의 형벌 가운데 있기 때문에 죄를 다스려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이 죄인인 아담과 하와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축복의 벌을 주셨는데, 3장에 축복의 벌을 주자마자, 4장에 이제 벌이 시작됐어요.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사단의 공격이 시작이 되었고, 거기에서 여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올 것을 믿으며 전쟁을 해야지 되는데, 선악과 먹은 죄가 원천적인 죄라면 이제 그것의 결과로 오늘 본문에 시기와 분노가 나타나는 거예요. 그니까 이 사탄의 이공격이 바로 이 시기와 분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래서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시면서 포기치 아니하시고.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이 죄와 시기심과 분노 가운데 하나님은 길을 가르쳐 주시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들 모든 이 환경 속에서 길을 가르쳐 주시고, 질투가 나고 시기가 나고, 분노가 나고 안색이 변한는 이 환경에서 그래도 주님은 사랑하셔서 오늘이 교회를 찾아오시는 분들 하나님께서 길을 가르쳐 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이 죄를 다스릴까요?

 

첫째, 여호와로 말미암아 말미암은 길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1절입니다

 

[4:1]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러니까 이 말은 여호와의 도움으로 이런 뜻이에요. 우리의 죄는 여호와로 말미암지 않고는 다스릴 수가 없는 거에요. 우리는 잉태의 고통과 해산을 통해서 이제 또 노동의 수고를 통해서 눈물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산자의 어미가 되는 이 벌을 주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왜 자녀를 낳아야 됩니까? 바로 이 산자의 어미가 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출생하기 위해서 아이를 낳아야지 되는데, 자녀를 낳기 위해서는 오늘 아내 하와와 동침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동침한다는 건 깊이 한다는 거예요. 그니까 우리가 자녀가 출생하면 두 부부가 알지 못했던 깊은 유대관계가 있잖아요. 그게 동침이에요. 동침에요. 후손을 낳기 위해서도 깊이 알아야 되는데, 그렇지 아니하고 자녀가 우리가 누구도 전도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제 축복의 벌을 받고 이제 쫓겨 났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벌 받아서 쫓겨 놨는데, 그래도 잉태의 고통을 통해서 자녀를 주시니까 이게 너무 기쁜데, 왜 그러겠어요? 배반해 쫓겨났는데 인류를 세워 갈지 지금 후사를 주셨잖아요. 그래도 혹시 내가 에덴 동산에 돌아갈 수 있을까? 나를 용서해 주셨는가? 이런 생각도 드는데. 그동안에는 생육하고 번성해서 충만하라고 고통도 없이 자녀를 낳았지만, 이제는 생물들이 그런데 인간은 이제 고통이 없이는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거를 주님께 미리 얘기를 들었잖아요. 항상 장차 받도 환난이 복음이라 그랬어요. 그니까 진짜 지난번에 축복의 벌을 받는 것이 예수님이 오는 길이라 그랬는데, 아기를 낳아 보니까 고통이 너무 심한 거예요. 남자들은이 고통을 몰라서 진짜 여자들한테 명함을 들으시면 안 돼요. 여자의 고통은 아기 낳는 고통은 우리는 저 세상을 몇 번은 왔다 갔다 와야지 아기가 낳는 거예요. 근데 그 고통을 통해서, 이 고통은 하나님 밖에는 저리 알 수가 없다는 거예요. 고통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니 그냥 아이고 하나님 소리가 저절로 나서, 그냥 고통을 통해서만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나오는 거예요. 이 고통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남편이 감사하고 뭐가 자식을 준 사람이고, 남편 갖고 돈 갖고 병원 갔지만, 그 고통을 통해서 이 고통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이제 알게 되고, 오늘 하가 뭐라 그럽니까?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 하였다. 내가 아담으로 말미암아 아니잖아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득남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된 것이에요. 하나님 나를 기억하여 주셨군요. 자기가 붕어빵 같은 가인을 낳아서 일류 최초에, 정말 인생이 출발을 했어요.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셨지만, 아담과 하와의 작품이 가인이에요. 획득하다. 얻다. 세우다. 이런 뜻이에요. 너무 좋은 거예요. 너무 좋아서 기쁘고 춤을 출 거 같은데, 그러나 인생이 항상 기쁜 일만 있겠습니까? 2절입니다.

 

[4:2]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아벨이 뜻이 공허하고 허무한 하다는 뜻이에요. 이 땅에서 무슨 유리하고 이런 뜻이에요. 우리가 문제가 없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내가 그래 큰 실수했는데 그래도 내가 교회 와서 한번 회개했더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가인도 주시고 모든 걸 얻게 해주셔서 너무 감사한데 그렇게 감사만 하면 교회에 문제가 하나도 없겠는데,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이 문제고, 문제가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요. 이런 문제가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답을 얻을 수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날마다 죄의 기록부가 우리의 평생에 기록부 거예요. 죄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거는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우리 집은 행복하고 아무도 죄 안져. 그거는 그냥 구제할 길 없는 정말 지옥갈 사람들인 거예요. 그런데 날마다 죄의 기록부를 쓰는 것이 바로 이 경건의 일기인 거에요. 죄를 지었는데도 하나님께서 돈도 주시고 합격도 주시고 아들도 주시고 그랬는데, 그렇게 모든 걸 주었으면 그 다음에 그 감격이 오래가지 않아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가인을 낳았다고 할 때 언제고 아벨을 낳았는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좀 이제 쑥 들어가 버렸어요. 이제 막 심드렁 해져요. 완전한 근본적인 회개가 없이는 일시적으로 하나님께서 뭘 주었을 때는 너무 기쁜 것 같다가, 이제 이 세상이 에덴을 쫓겨 놨으니까 고통과 수고 세상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그래서 허무해졌어요. 참으로 아벨은 양치는 자이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어요. 벌대로 아들들은 가시덤불과 엉겅퀴 사이에서 땀흘려 수고하고 수고하면서 벌을 잘 받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제 이 가운데서 지금 아담과 하와가 자녀교육에 실패했어요. 롤 모델이 없어. 역할모델이 없어. 처음 부모를 해도 해보다 보니까, 처음 부모를 하다 보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몰라. 그래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일하다 보니까 예배도 소홀이 되고, 뭐가 제대로 되는 거 같지도 않니하고, 그런데 맨 처음에 태어난 가인이 얼마나 예뻤겠어요. 자기 붕어빵 같은 외로운 인생에 가인이 태어났지 않아요. 그 나한테 모든 걸 다 더해 줄 거 같은 거예요. 다 모든 걸 획득하게 해줄 거 같은 거예요. 그래서 너무 기뻤는데, 너무 기뻐하다가 보니까 아벨이 나왔어요. 그런데 아벨을. 아벨이 나왔는데 난 이랬을 것 같아요.

 

가인이 가인만 너무너무 이뻐하다가 아벨이 나왔데, 아벨을 엄마 아버지가 이뻐하는 것을 보니까 시기 질투가 났어요. 분한 거에요. 그러다 보니까 보모가 그걸 보니까 인생이 너무 허무해. 그래서 막 싸우는 거에요. 가인이 날마다 주먹을 드리대는 거에요. 그래서 허물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까? 왜냐하면은 아담은 너무나 주님의 시선으로 이름을 잘 붙이는 사람인 줄

아시죠? 제가 이거 어떻게 이제 깨달았는가 하면은? 사람은요. 이뻐하는 데는 답이 없는 거예요. 사랑하는 데는요, 기침하는 데는, 답이 없는 거에요. 감기가 걸려서 재체기하는 거. 말이 맞나? 사랑하는 거하고 재체기 하는 거는요. 숨길 수가 없다고 그랬어요. 제가 이제 손녀딸을 낳고 보니까 진짜 거예요. 객관적이 될 수가 없는 거예요. 보기만 하면 예쁜 거예요. 그러다가 지금 이제 둘째를 낳는데, 전부 다 첫째만 보고 맨날 상기 상기 하다가, 둘째가 났는데 객관적으로 누가 더 예쁜지 모르겠어요. 사실 둘째가 더 예쁜 거 같아. 걔가 얼굴 더 하얗고, 근데 우리는 모두가 다 상기만 부르짖어요. 그러니까 똑같은데 이러는 거예요. 둘째 보고 아니 상원이는 안 보이냐고. 지 엄마가 그래요. 여기 상원이기만. 그러니까 이제 이렇게 하다 보니까, 어디 목장을 갔는데 모든 식구들이 상기 다 예쁘다 그러는데, 맨 마지막에 한 엄마가 어머나 상원이가 너무 예쁘네 그랬더니, 상기가 모두 자기 예쁘다 그러다가 한 사람만 예쁘다 그러지 않으니까, 갑자기 얼굴이 이그러져 가지고 얼굴이 그냥 그걸 보면서 내가 인간이 얼마나 어려서부터 죄인이라는 거를 알게 되고,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도 가인과 아벨를 다를 수가 없었던 것이, 그냥 이쁜 거예요. 첫 아이가 .모두가 처음부터 봐서 이제 익숙해졌아요. 뭔가 얻은 거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이 문제를 누구도 비겨 갈 수가 없다니까요. 내가 이뻐 가지고 이쁘다. 이쁘다. 이쁘다하는 애들이 얼마나 다 시기, 질투의 화신이 되는지 몰라요. 난 하나님이 그 만세 전부터 이렇게 될 줄을 알고, 어려서부터 이쁘다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에 대해서, 지금 오늘날 내가 주의 종을 하는 게 아닌가. 난 이쁘단 사람이 없어. 어려서 이쁘다 사람이 없고 결혼했더니, 남편에 또 이쁘다는 소리를 안 하고 사양한다는 소리도 안 하고, 계속 그래 가지고, 근데 딴 사람들이 나와서 아무리 이쁘다고 그래도 집에서 그런 얘기를 못 들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이쁘다고 그러는 거 다 헛 얘기야. 집에서 다 이쁘다고 그러는 게 아닌데 뭐.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에요. 그 축복이기도 하고 슬픔이기도 하고 이제 그 지만은 저는 이제 가인이 그 이름 뜻을 생각하면서 왜 허무하다고 공허하다 그랬을까? 이 땅은 이래 봤자, 저래 봤자, 사실 천국 같은 에덴 동산을 쫓겨 놨는데 뭐가 기쁘겠어요. 잠시는 기쁘겠지만, 진짜 제 2의 에덴을 이제 찾아가야 되는데,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자기 아들, 딸 지금 이제 아들 교육 실패, 자녀 교육 실패했어요. 한 아들은 죽고 한 아들은 이제 떠나 버린 거예요. 그니까 이거를 다 깨달아가면서 나중에 130살에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 셋을 낳게 되는 거예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다른 씨, 자기가 이뻐했던 아들도 아니고, 허무했던 아들도 아니고, 그냥 연약한 씨잖아요. 연약한 씨에서 예수님이 오는 거예요. 할렐루야. 우리 집에도 우리 집에서 제일 천덕 꾸러기였던 막내 딸에게서 제일 하나님께서, 썼다고 그러면 또 교만하고, 하여튼 간에 생각지 못했던 이제 곳에서 예수님의 씨가 오는 줄 압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왜 인생이 허무한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왜 허무한가? 예배가 올바르지 않아서 그래요.

 

두 번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죄를 다스릴 수가 있어요.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를 드려야 이제 죄를 다스릴 수가 있어요. 이제 3절입니다.

 

[4:3]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이제 예배를 드렸어요. 재물을 드렸어요. 세월이 지난 후에. 우리는 세월이 지난 후에 이거는 무슨 뜻인가 하면은 심사할 때가 가까웠다. 이거예요. 먹고 사느라고 자식 키우느라고 바빠서 나는 예배드릴 시간도 없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예요.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인데, 나는 아이 낳고 일하느라고 그렇게 살아보세요. 오늘 제가 차가 타이어가 빵구가서 택시를 타고 왔어요. 아저씨 보고 여기까지 데려다 달라고 그러고. 내가 지금 한 시간 수당을 드렸테니까 예배를 드리고 가시자고 이렇게 일하는 게 다가 아니라, 아저씨는 지금 고생하는데 천국도 못 가면 예배도 못 드려서 예수도 못 천국 못 가면 어떤 부자들은 돈도 많아서 예배 와서 천국 가는데, 너무 억울하지 않아요? 너무너무 억울하잖아요? 아저씨 꼭 천국 가야 된다니까, 제가 한 시간 수당 드릴테니까, 예배 보시고 가자고 그러고 그래도 그냥 갔어요. 내가 막 현찰을 흔들면서 돈을 내면서 여러분들 그래 봤어요. 예 그게 다가 아니에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어느 날 보니까 인생이 허무해요, 공허해요. 어느 날 보니까 외롭고 슬퍼요. 아이 키우느라, 입시 치르라고 긴장해서 살다가 애가 대학교에 딱 들어가 보니까, 너무나 아파 버리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에요. 우리는 세월이 가기 전에 빨리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데 내가 예배를 잘 드렸는지, 안 드렸는지, 세월이 지나면은 내 예배가 올바른 예배였지 심사받을 때가 와요. 애가 대학에 붙었는데도 겸손하게 계속 봉사하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 붙어서 교만해서 봉사 다 내려놓고, 완전히 돌아가는 이런 사람이 있어요. 떨어져서 낙심하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떨어져서도 기뻐하는 엄마가 있는가 하면은, 다 각자 자기 예배가 올바른가? 그런가?는 사건이 오면 심사할 날이 딱 다가올 줄 압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는 뭐고, 안 받으시는 예배는 뭔가? 가인의 예배는 안 받으시잖아요. 가인의 예배를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예배예요. 그거는 뭔가? 우리 3절과 5절을 봅니다.

 

[4:3, 5]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제사에는 재물이 필요한 것처럼 예배에도 재물이 필요해요. 어떤 알맹이를 가지고 어떤 콘텐츠를 가지고 어떤 본질로 가서 예배를 드리는 가?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거예요. 가인은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게 아니에요. 누구보다도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재물도 열심히 드리고 그래서 상 받아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안 받으셨어요. 예배는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가야 되잖아요. 사랑과 학과 편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 열매를 가지고 가야지 되겠는데, 이제 기복적인 예배, 지식적인 예배, 일시적인 예배를 드리니까, 시간이 지나면 이렇게 받지 않으세요.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원망이 나오고, 분하고, 펄펄 뛸 일이 생기는 거예요. 이사야 111

 

[1:11]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13-14]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의 예배와 절기 지키는 것이 나에게는 무거운 짐이고 곤비하며 참지 못하겠다. 이래요. 헌금 가져오고, 있는 대로 예배 오는데, 절기 지키는 거, 하나님이 다 무겁다요. 싫대요.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눈을 가리우고,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교회를 가도 듣지 아니하는 예배가 있답니다. 하나님 앞에 보이려고만 오고 누가 요구하였다고 너희들은 하나님의 전 마당만 그렇게 밟고 있느냐? 이런 예배가 있다는 거예요. 왜 이런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거듭나지 아니하고 주님을 만나지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않으면서, 종교적인 위선을 가지고 이제 오기 때문에, 가치관이 전혀 바뀌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종교처럼 믿는 거예요.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고 신분이 바뀌는 것입니다. 근데 자기의 존재를 모르고 신앙생활 하려고 하니까, 행위만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에요. 예수 믿고 가장 큰 은혜가 모이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감격하면서 끝이 없는 것이, 이게 구원받은 공동체의 모임인데, 이런 모든 것이 형식이 되다 보니까, 교인들데 분란이 일어나고, 비교하고, 시기, 질투가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께서 정한 절기를 싫어하시면 그것이 무거운짐이라고 하시는 것은 어떻게 적용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돈을 인간관계에서도 안 받을 때 받으면요. 이것이 이제 부담이 되는 게 있어요. 천원 받아야 될 때 만원 받고, 만 원 받을 때 10만원 받으면 부담됩니다. 하나님도 안 받을 걸 받으면 부담이 될 때가 있어요. 언제 부담이 되는줄 아세요? 너는 법대로 욕심을 부리지 말고 사업을 해라 욕심을 부리지 말고 학교를 가라 이러면은 욕심 부리고 사업하다가 안 듣다가 망하면, 망하면 대출받아서 빨리 헌금하면 하나님, 하나님, 이번 사업을 하나님, 하나님, 꼭 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망하고 나면 우리나라는 법대로 하다가는 망하는 게 우리나라니까. 그리고 나는 괜찮지만은 내가 다 자식 때문에 이짓하고 사는 거라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헌금만 하면 축복받는다. 자꾸 이렇게 설교하면 안 되는 거예요. 헌금만 하면 축복받는 게 아니에요. 이렇게 하나님께 드릴 이런 열매를 드려야 되는 거잖아. 헌금은 십일조는 신앙 고백으로 눈물로 드리는 거지, 내가 정말 사업이 잘되려고 지금 들리면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아닌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힘든 현실 속에서 자식들에게도 같이 겪고 보여주면서 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재물이에요. 망했으면 같이 망해야 되는 거예요. 나는 망했는데 너만은 이딴 소리 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다 망했으면 같이 망하는 식구들도 같이 망하는 거예요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큰 통로지. 그걸 모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내 마음대로, 내가 복음식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서 안 받으시는 거예요.

 

그럼 아벨의 예배는 뭔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에요. 아벨은 근데 어떻게 예배를 드렸나요? 4절에 보니까.

 

[4:5]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그러면 아벨과 가인이 무슨 차이가 있어요? 여기는 농산물로, 여기는 양으로 드려서 받으셨어요? 그럼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니지요. 그 재물에 종류가 달아서 안 받으시겠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냥 곡식으로 절대로 안 들린다고. 그건 아니고요. 가인은 땅에 소산을 들였는데 아벨은 첫 새끼를 들었다고 그랬어. 가인은 그냥 농사하는 많고 많은 그냥 곡식 중에서 일부를 들인 거고요. 아벨은 그 양 새끼. 얼마 안되는데, 그 당시에 그냥 거기에서 첫째 가장 뛰어난 걸 드렸고, 살찌고 기름졌다는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을 드렸어요. 하나님 연랍하셨어요. 기쁘게 받으셨어요. 돕기 위해 둘러 보셨어요. 연랍하셨다는 거죠. 아벨과 재물을 둘러 보셨어요. 하나님께 큰 관심을 받았어요. 사실 있잖아요. 재물의 종류는 가인께 훨씬 좋아요.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축복의 벌로 네가 땀을 흘려서 수고하고 채소를 먹을지니라 그러니까 농사가 뭔가 훌륭해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자기가 좋은 거 다 하고 있어요. 가인이 그런데 이제 아벨은 별로 드러나지도 않아요. 물론 저 동물도 하나님께서 다스리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양을 쳤지만 꼭 가부의 옆전 두 푼 같이 드러나지도 아니하고, 그냥 그런 어떤 양을 쳤으니까, 뭔가 피 제사 같고 보기도 끔찍스럽고 이러지만 보기도 아름답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 아니에요. 가장 큰 정성으로. 그냥 너무나 부끄러운 마음으로. 이걸 드린 것에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주 그냥 기뻐하시는 재물이라는 거예요. 돈 많은 사람에 많은 사람이 헌금합니까? 안 해요. 근데 없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열심히 하는 것을 나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그런 사람을 나도 관심 갖고 돌아봐요. 알아요? 그게 뭔 말인지 제가 알아요. 이사야 115

 

[1:15]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예배를 드리면 어떻하냐? 길이 있는데 이렇게 길이 있대요.

 

[1:16-17]

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이게 참된 예배래요. 하나님 받으시는 예배래요.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18

 

[1:18]

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우리의 선행을 그러니까, 우리가 죄가 문제가 아니라, 이 스스로 씻지 않는, 회개하지 않는 이 마음이 문제 거예요. 죄가 문제가 아닌 거예요. 우리는 늘 죄의 소원이 있거든요. 선행을 배우라 그랬어요. 이 선행이 적용해요. 이거 행위가 아니에요. 그러나 공부가 많이 있고 성경을 많이 알게 되면 적용이 풍성해지는 거예요. 우리가 목장 나눔에서 그까 날마다 성경을 배우고 그 사람들이 했던 모든 것들을 들면서 얼마나 성경 실력이 쌓이고 선행이 배워지는 건지 몰라요. 날마다 뭐가 배워지는 가하냐면, 내가 얼마나 선행을 못 하는가를 이걸 알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데 그냥 기도해서 복 받으면 되지 뭐가 그렇게 어렵냐? 적용도 배워야 되는 것처럼, 선행도 배워야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 선행을 배우고 공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려고 해도, 그러지 못해서 날마다 주일 예배, 목장 예배, 부부 목장 예배, 일대일 양육 등에서 예배 때마다 스스로 씻고, 스스로 드러내면서, 회개를 하면은 나는 정말 과부를 못 도와줘요.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지 못했어요. 생각도 안 하다가 모이면은 내가 얼마나 죄인인지 드러내고 간증하는 거예요. 그렇게 말만 해도 18절에 오라 주님이 초청하시는 거예요. 오라. 길이 열리는 거예요. 모든 것을 낱낱이 드러내고 간증하시는 것이야말로 주께서 오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하얘질 것이라고 하신 것이예요. 오늘 집사님이 그니까 오라. 자기 이 모든 걸 왜 드러내요? 자기가 성추행했다는 거 뭐 때문에 드러내요. 근데 이런 것을 드러내면 그냥 내가 깨끗하게 살려고 마음만 먹어도, 주님께서 오라.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어질 것이요. 이게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라고요. 내가 죄 안 짓는 게 아니라, 날마다 회개하고 내 죄를 씻는 거 혼자서 돼요? 안 돼요. 이 말씀 듣는 구조 속에 있어야 돼요. 어떤 분이 너무나 힘들어서 왔다가, 이제 남편 문제 해결하고 또 갔는데, 또 가서 여전히 기복적 드리다 보니까, 또 문제가 왔대요. 이렇게 구조가 너무 중요한 거 있죠. 말씀 듣는 구조 속에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정말 어떻게 하면 좋은 가? . 정말 모든 교회가 힘들 때마다 와서 이제 해결하고 돌아가야지 되겠는데, 그렇게 우리가 날마다 그냥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하나님이 왜 축복 주는 걸 못 믿느냐고, 이거를 어떤 이생의 축복하고 연관을 들이게 되니까, 우리가 지금 이렇게 슬퍼하고 안색이 변할 일이 온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즐겨 순종하면 19절에

 

[4:19]

19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20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결국 가인은 거절해 칼의 삼키우는 인생을 살게 됐어요. 그러면 아무리 양육을 해도 여러분들이 결정하셔야 돼요. 여러분 스스로 드러내고 깨끗하고, 깨끗하고, 이제 회개를 하고자 하면, 하나님이 오라. 오라.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하해지리다. 이 말씀을 믿으세요? 우리는 그렇게 가인처럼 그냥 멋있고, 아름다운 그게 아름다운 예배가 아니라니까요. 우리들 교회라고 온전하겠어요? 그러나 온전하지 못 하지만 목장에서 이런 얘기를 드러내고, 권고하고, 서로 충고하고, 교훈 받고, 책망받고, 바르게 함으로 나가는 거죠.

 

제가 이번 주일은 이런 목장 보고서 다 읽었다니까요. 지난주부터 나는 가치관에 혼란이 왔다 지난주 내가 목장에서 한 말에 대해 처방을 받을 때, 충격을 받았고, 부부 목장에서 남편이 한 말에 대해서 충격을 받았고, 목장에서 오픈을 하는 것이 힘든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목장에서의 나눔이 말장난 같다. 나는 진실을 오픈했는데, 거짓말이라고 하니까, 일주일 내에 목장이 되었다. 목장에서의 나눔에 대한 처방에 대해 기준이 없는 거 같다. 사랑하는 모습이 다 다르지 데, 똑같은 처방만 하는 거 같으며. 나는 평소 시어머니를 친정 어머니로 생각했었는데, 남편이 목장에서 그런 말 하지 마라. 시어머니는 시어머니가 며느리는 며느리다 하는데, 충격 먹었다.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에게 나쁘게 한 것만 기억하고. 성경 말씀에는 남편은 부모를 떠나라 했는데 남편은 하나님과 부모님을 동동하 여긴다. 나는 구원 때문에 시집와서 시어머니에게 나름대로 잘했는데, 지금에서는 억울한 이야기만 하니, 억울했다. 나는 그동안 시댁의 썩은 면류관, 시댁 형제들의 사업을 위해 빛을 다 꿔다줬는데, 이런 썩을 면류관을 해서 절제하며 살아왔는데, 목장에서 거짓말이라고 하니 가슴 아프다 그렇다면 어떻게 적용해야 되는지를 모르겠다. 이랬더니, 딴 집사가 나도 시아버지를 10년을 모셨는데, 남편이 내가 무슨 남편을 모셨냐고 쌍욕했다이러고 또 말했을 때 억울했어요. 또 한 집사가 난 또 시댁식구를 다 끌어앉고 싶은데 가족들이 내 마음을 몰라주고 세상적인 눈으로만 나를 바라보니, 적용을 어떻게 하는가가 고민이다. 그러니까 또 이제 어떤 집사님이 이러고 저러고 이제 불신 결혼하신 걸 회개하라 그랬더니. 내가 언제 불신 결혼했냐? 남편은 나와 만나자마자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것도 불신 결혼이냐? 서로 싸고 난리났습니다.

 

지금 그러니까 남편에게, 자녀에게, 시댁 형제들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적용인지 혼란이 심하다. 남편이 내 기도를 막고 있고, 갈등이 나고, 드러난 사건에서 이제 내 죄, 내 생색을 보게 되었다. 그래도 얘기를 하셨어요. 또 어떤 분은 죄 안 지려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했고,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편한데, 왜 자꾸 적용하라 그러냐. 좀 그렇다. 이렇게 또 얘기를 하셨어요. 또 한 분은 난 여태까지 하나님을 만났다고 확신하며 살아왔는데, 내가 하나님께 올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이 오고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 가 의심스럽다. 구원 때문에 희생하며 절제하면서 살아왔는데 그것이 잘못되었다면 구원 때문에 무엇을 어떻게 해 하나? 남편이 억울한 소리 아니, 억울하다. 이제 이러면서 막 주고 받았어요. 그때 목원들이 뭐라 그랬냐면? 남편분의 눈이 정확한 것 아닐까요? 이렇게 목원들이 대표해서 이렇게 얘기를 해 주셨던만요. 그러니까 싫은 얘기를도 이렇게 나누고, 교훈 받고 책망받고 바르게 하고 선한 길로 인도하는 거예요. 내가 잘라 소리가 모이는게 아니에 못났어도 속상해도 이렇게 목장에서 떠 들어야지 밖에 나와서 떠드시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 그러면 흉 밖에 안 되는 거예요. 아셨어요? 그러니까 예배가 잘 못 되면은 그러니까 예배가 잘못되는 게 아니고 내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니까, 이 자리에 앉아 있어도 가인의 예배가 있고 아벨의 예배가 있잖아요. 아벨의 예배는 십자가를 드리는 예배, 가인의 예배는 그냥 정말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예배, 그런데 잘못된 예배가 되면은 이제 분노가 오는 거예요.

 

 

세 번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는 분노를 다스리는 예배입니다.

분노를 다스려야 되는 거예요. 이 잘못된 예배의 결과로 분노가 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가인과 그 재물은 연랍하지 않으셨지요. 그니까 5절에

 

[4:5]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사건이 왔어요. 지금. 그러니까 이제 내 그야말로 이제 내가 대학교 떨어졌어요. 심히 근심하는 거예요. 가슴이 벌렁벌렁 벌렁벌렁 거리는데, 아벨 동생 아들은 붙었어요. 아벨에 대해서 맹렬하게 시기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똑같이 겨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렇게 분한 거예요. 막 그냥 안색이 변하는 거예요. 특히 아벨의 것을 받으셔서 더 화가나요. 먼 곳에 있는 사람 받은 받는 거하고 상관이 없어요. 인간은 가까운데 있는 사람이 제일 화가 나는 형제가 제일 화가 나는 거예요. 오죽 하면은요. 동생을 죽였겠어요. 인간은 누구나 예외가 없어요. 자녀들을 믿음으로 양육 시키지 않으면 나중에 살인하지 않다는 보장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화가 나면 다 죽여 버리는 거예요. 여기 아담과 하와의 첫 자손이 살인을 했잖아요. 우리 아까 짐바르도 스탠포드 감옥 실험을 봤잖아요. 여러분들이 이거를 우습게 하찮게 여기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 자녀 교육 잘 시키려고 얼마나 부모가 눈물로 살아야 되는지 몰라요. 적용을 길로 놓고 걸어가야 되는지 몰라요. 그러니까 우리는 아벨의 재물을 받으셨구나. 그거 배우면 되는데, 교회도 많이 모이면, 정말 적게 모이는 교회가 배우자 이러면 될텐데, 모이는 교회에는 교만하고, 조금 모이는 교회는 분에서

팔팔 뛰고, 이러니까 이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 그래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지금 벌도 주고 우리한테 길도 다 가르쳐 주셨잖아요. 그니까 내가 벌 잘 받으라고, 수고하고 아이를 낳고 남편을 사모하고 다스리라고, 그 가운데서 주먹질도 나오겠지요. 그 땀흘려서 수고하라고 거기서 일도 못 하겠죠. 이런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인 거예요. 거기서 제발 죄 짓지 마라. 죄 소원은 일어나지만, 너 남편이 바람펴서 너무나 밉겠지만, 죄를 다스려라. 일거리가 없어도 죄를 다스려라. 죄의 소원이 일어나지만 너 상사가 미워서 죽을 지경이 있지만은, 죄를 다스려라. 그게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다. 너 하나님께서 돌아오게 하려고 하는 메시지다. 그러니까 어떤 사건도 어떤 환경도 내가 분해하면 그건 아닌 거예요. 내가 예배가 잘못된 거예요. 내가 안색이 변하면 잘못된 거예요. 목장에서 내가 안색이 변하면 내 예배가 잘못된 거예요. 어떤 경우도 어떤 경우도 내 안색이 변함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인정받지 못함에 대해서 심히 분해하면은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게 늦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남편이 시아버지는 시아버지고 며느리는 며느리다. 이러면은, 며느리가 어머 어머머 당신은 어떻게 진리를 알았어요? 이렇게 얘기를 하여 엄마 정말 우리들 교회 최고야. 당신 최고야. 이러면, 남편이 인증해 줄 텐데, 그냥 내가 한 거를 못 알아준다고 나는 친정 엄마처럼 모셨는데, 시어머니는 시어머니, 그거는 우리 인간이 죄인이라니까요. 그 집사님, 그러면요. 아직 수가 한참 아래인 거예요. 시어머니 시어머니에요. 아니 형제들 가운데도 지금 살인을 하는 판인데 시어머니 시어머니에요. 영원한 시어머니인 거예요. 이거를 남편이 얘기해 주니, 얼마나 고마워요. 그런데도 시어머닌데 친정엄마처럼 모셨으니까, 감사한 건데 한 마디 잘못해 가지고 지금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러면 남편이 그래 당신 억울하지? 이럴 거 같아요? 이 남편이 이런데 와서 얘기해 주는 것만도 너무 고맙게 여겨야 되는데, 남편의 다스림을 받고 사모 해야지 되는데, 목장이 와서 이런 얘기를 해 주니까 너무 고맙다 그래야지. 내가 진짜 엄마처럼 모셨는데 뭐라고 시어머니 시어머니를. 그래서 내가 못 살겠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돈도 많이 쓰고 그랬는데. 아직 구원이 아직 예 약간 그러니까. 이제 우리가 보세요. 히브리서 114절 말씀처럼

 

[11:4]

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정성으로 드린 제사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이 십자가의 제사요. 피 제사에요. 그게 바로 아벨의 제사에요. 아벨의 제사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남편을 섬기고 다스리고 아이를 낳아서 고통을 당하려면 십자가 짐 같은 그냥이 사단이 와서 뱀이 발꿈치를 날마다 상하고 피를 내는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 정말 천부의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가는 거예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할 일이 뭐가 있어요? 내가 남편한테 잘한 게 내 힘으로 잘했어요. 하나님의 힘으로 잘했는데, 내 힘으로 하니까 생색이 나잖아요. 내가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걸 깨달으면 내 힘으로 하는 게 어디 있어요? 그 내 힘으로 하니까 억울하잖아요. 내 힘으로 하니까, 생색이 나잖아요. 얼마나 생색이 나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겠 있어요. 이 세상에 시기, 질투,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 몰라요. 그런데 이런 십자가 제사는 안 드리고 가인은 싫은 부모 남편 다 안 버리고 이혼에 버리고 와서 헌금만 내고 교회만 나오니까, 하나님이 내가 무겁다 그러잖아. 네가 그러는 게. 네가 진짜 들여야지 될 거는 헌금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남편 사모하고 때려도 맞고 다스림을 받고, 아이는 가출해도 정말 길러야지 되고 이거 하고 천부 의지 없어서 이래야 되겠는데, 그런 거 다 안하고 애들은 유학 보내 버리고, 이혼해 버리고, 돈 가지고 와서, 헌금하고, 하나님이 내가 수양의 재물에 배가 불렀다고,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아벨의 예배가 뭔지 아시겠지요? 정말 끝까지 상함, 이 십자가의 예배 피 제사. 그러면은 이 아벨은 진짜 가죽 옷을, 가죽옷이 나의 이 모든 것을 부끄러움을 감춰 주듯이. 내가 아무리 남편이 때리고 난리를 쳐도 내가 이렇게 십자가를 잘지면 하나님이 죄를 다 가려 주셔서 부끄러운 게 하나도 없다니까요. 근데 가인은 있는 대로 잘난 척을 해도 무화과로 가린 거하고 똑같아서 자기가 창피해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자기가 누가 뭐라 그러지 않아도 그리고는 그냥 다 분해 죽는 거예요. 자기 죄를 자기가 진 거예요. 죄를 다스리지 못해 자기 죄를 다스리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인간의 의로 구원 못하는 것처럼 내가 이렇게 쉽다면 뭐 때문에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집에 정말 지금 돌봐야 될 사람들이 많은데, 다하기 싫어가지고. 하나님이 상급 자체가 돼야 돼요. 사람에게 인정받는 게 상급이니. 억울하고 분해서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진짜로 우리 가운데 제일 맹렬한 시기심이 일어나는 사람이 형제가 아니에요. 죽이고 싶은 사람이 바로 형제가 아니에요. 우리 집은 너무 아름답고 우리 집은 너무나 형제가 화목하고 아니에요. 아니에요. 오늘 짐바르도 교수에 스탠포드 감옥 실험. 이 성경을 증명하려고 이런 거 찾아오느라고 머리에 쥐가나요. 여러분들 내 말 좀 들으라고. 그러니까 별로 이렇게 기대하지 말아요. 그러니까 별 인생이 없어요. 착한 사람도 없고 악한 사람도 없어요. 그냥 여호와로 말미암아 여호와로 말미암아 죄를 다스려야 되는 거예요. 선을 행할 때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름에 거두니라 그러는 거예요.알아주지 않으면은 분에서 막 안색이 변하면 모든 묵상 예배 봉사 다 헛 거예요. 하나님은 계속 네가 어찌하여 지금 6

 

[4:6-7]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계속 지금와서 양육을 해주시잖아요. 아벨은 가만히 있잖아요. 계속 가인을 찾아가는데, 가인이 하나님 말 안 듣지 않아요. 너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 기가 막힌 죄를 행하고 있는데도 가인에게 찾아와서, 너 죄를 다스려라 두 번째, 세 번째, 계속 기회를 주시는데, 우리는 믿음으로는 죄를 다스릴 수가 없어요.

 

이잖아요. 미국의 어떤 그 죄수의 실제 교도소 생활했었던 죄수의 고백이에요. 자긴 37개월 만에 교도소 독방에서 벗어났는데, 옆 간방 사람에게 속삭거리 기라도 할라면은, 곰복 매가 그냥 등과 어깨로 쏟아지고, 내 몸에 이나, 다른 벌레들이 있다고 발가벗인 채 뿌려지는 살충제, 맨바닥에서 이불도 침대도 없이, 알몸으로 자야했고, 맨손으로 화장실을 변기를 닦아 했던 시간들, 나는 도둑이 반드시 처벌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내가 도둑이라도 절도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 결코 재활이나 갱생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출감 할 때 생각한 거는 그 나를 때린 사람들을 죽여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없이 나왔는데, 너무나도 감사하게 내가 정상적인 도덕성을 찾았다는 것, 이게 너무 감사하지만,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나 잔혹했다. 여러분들 감옥 가서 사람 안 변하는 거예요. 사람은 죄인이라서 더 악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최초로 감옥에 가는 걸 우리 너무나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은 이 욕심을 어떻게 다스리죠?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죠? 이 욕심과 탐심을 어떻게 다스리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때 죄가 다스려지는데, 선을 행한다는 것이 선의 의미를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 날마다 아까 우리가 참으로 선행을 배워야된다 그랬잖아. 맨날 목장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파워풀한 거는 날마다 모여서 나누고 격려받고 교훈하고 책망받고 최고예요. 최고. 이게 말씀 듣는 구조가 최고인 거예요. 여러분들 그거 밖에는 여러분 주홍 빛 같이 붉은 죄가 깨끗해질 사람이 없는 거예요. 우리는 끊임없이 욕심을 가지치기를 해내야 되는 거예요.

 

유명한 정신과 전문의가 그랬어요. 당신 잘 버리는 사람인가? 나는 정말 못 버린다. 자료 책, 편지, 일기장, 다 내 분신 같아서 못 버린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감정을 버려야 함에도 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들여다보면, 얼마나 그 대상에 대한 친밀감이나 나름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남성은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정작 사기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상처가 있고 불행한 여성들이었다. 이유가 있겠지만은 상처 있는 사람들하고 만날 때 정서적 친밀감이 크기 때문이다. 우울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우울한 여성들과의 만남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행복한 여성들에게는 이질감을 느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가 버리지 못하는 것 중엔 그것이 좋든 싫든 자유화가 된게 많아요. 처음에는 불편한 옷이었지만 이제 나중에 자신을 이루는 피부가 돼 버렸어요. 그러니까 내가 나의 것을 버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그래서 그 아버지의 그 아들, 그 어머니의 그 딸, 그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 거에요. 못 버려요. 다 욕하면서 담게 돼 있는 거예요. 병이 되는 거예요. 그러므로 버리는 거보다는 채우는 거보다 한 수인 거예요. 이 잘 버리는 거는 이제 채우는 거는 욕심으로, 버리는 거는 이제 지혜로 버려야 되니까. 버리는 게 훨씬 지혜로운 일 있는데 못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버리려고 애쓰면 안 되고 버리기에 앞서서 욕심으로 채우는 거부터 조절하셔야 되는 거예요. 왜냐면 채우는 건 지금부터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늘 말씀 듣는 구조 속에서 채우는 걸 날마다 날마다 가지치기를 해 나가고, 그때 무조건 다 잘라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중심은 항상 단단히 하고 가지치기하고 내가 어디가 잘 못되었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들 죄를 다스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맺어요. 우리 죄를 마음의 소원 내게 있으나, 죄를 다스리라고 해요. 죄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필요해요. 뭔가를 획득하면 우린 허무가 몰려올 때가 너무나 많아요. 세월이 가기 전에 심사의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들여야 돼요. 평생 예배를 드리고도 하나님이 안 받으시는 예배가 있다고 그래요. 그러면 이제 분노와 안기 변함이 오는 거예요 어떤 것도 분노가 일어나면 내 예배가 잘못됐다. 재물이 잘못 드려졌다. 사랑과 락과 합과이 모든 성령의 열매가 들여지지 않아서, 안색이 변하는 것인데, 이제 내 예배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를 깨닫고, 이제 정말 그러지 않기를 여러분들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내 힘으로 할 수 없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오늘 보혈을 지나 예수의 이름으로는 밖에는 이 죄를 다스릴 힘이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을 알고 이제 오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찬양 : 보혈을 지나)

 

[마무리기도]

죄를 다스리라고 하시는데 끊임없이 죄의 소원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나가 버리고 그만둬 버리고 이혼해 버리고, 주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 참으로 너무나도 많은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살았는데, 사업도 안 되고, 회사를 위하여 주야로 충성 봉사했는데 승진도 안 되는 거 같고, 이제 남편이 바람 피는 것도 지쳤고, 심드렁하고 자식들이 말 안 듣는 것도 이젠 인생이 허무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자식들을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또 아내를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한 거 같지만은, 이제 세월이 지난 후에 심사할 사건으로 이제 사건이 오니, 이제 모든 것이 공허하고 외롭고 슬프기만 합니다. 주님 내 예배가 기복적이고 형식적인 예배였다는 것을 아무리 알아도, 주님 보이는 것이 이생 뿐이라. 섭섭하고 몹시 분하고 창피하고 정말 허무하고 외로워서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 내 욕심을 버리라고 하는데, 내 욕심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 가인이 하나님이 양육을 해주시는데도 도무지 이게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아벨를 죽인 것을 보며, 우리 죄의 뿌리가 이렇게 끈질긴 것을 봅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시고, 우리의 이 모든 것들이 십자기의 아벨의 그 피해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쉬운 것만 좋아하고, 편한 것만 좋아하기 때문에, 주님, 내 죄가 나를 증거해서 창피해 살 수가 없어서. 가지 옷을 입혀 주시는 이 보혈의 제사로 말미암아 이제 주님 앞에 당당히 나아감을 얻어야 하는데,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 꼭지가 따지지 않아서, 이렇게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그래서 분노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 인생을 진하고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시고, 그래도 우리는 모든 것들을 버릴 수 없지만, 지금부터 공동체에서 욕심을 버려가는 훈련을 채워넣는 거부터, 안 하는 훈련을 할 적에, 죄를 다스리게 하여 주신다 그렇게 하기를 원합니다. 도와 주시옵소서. 특별히이 시간 형제간에 반복하고 실시하는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오니. 그것이 천인공노할 죄도 아니고, 성경에 나온 우리의 본성이라고, 가장 가까운 데서 잘되는 것을, 아버지 하나님, 시기하는 맹렬하게 시기하는 정도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고, 주님, 이 문제를 예수의 이름으로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보혈의 능력으로 극복하기를 원합니다. 우리 속에 더러움을 보시고, 아버지 하나님, 너희 죄가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주님께서 늘 오라고 하시오니, 이 모든 것을 드러내고 기도할 때에 양털 같이 희어 지어지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주실 것을 믿습니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식 간에도, 직장에도, 아버지 하나님, 우리의 분노와 안색이 변함은 내 문제라는 거, 내 예배가,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되지 아니하는 거, 하나님 자체가 상급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사람들이 상급이 되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부터 죄를 다스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도록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영혼을 흔들어 깨워 주시옵소서. 죄를 다스리게 도와주시옵소서. 이 모든 더러움 마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우리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사단아, 물러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물러갈지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김양재목사님 설교]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RoQipHQIcQQ&t=698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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